감동글

퇴계 이황의 일화 네가지

우현 띵호와 2021. 9. 8. 06:54

퇴계 이황의 일화 네가지

첫째 : 며느리를 대하는 일화!
퇴계 선생 묘소 바로 아래쪽에 며느리 봉화 금씨 묘가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의 무덤이 남편옆이 아니라 시아버지 곁에 있다고요?

이황이 21세에 맞이한 부인은 27세에 사별하고

30세에 재혼했던 안동 권씨 부인과 또한 46세에 사별하게됩니다.

그래서 이황이 늙어 만년에는 봉화 현감으로 있던 맏아들 준(寯)의 부인

봉화 금씨가 시아버지 (이황)를 지극 정성 으로 모셨고,

퇴계 또한 그 며느리를 친딸처럼 아꼈다고 합니다.

며느리 봉화 금씨는 자신이 죽으면

“시아버지 무덤 옆에 묻어 달라. 죽어서라도 정성껏 모시고 싶다.”고

유언을 했고, 퇴계의 손자 이안도(安道)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할아버지 (이황)의 무덤아래 어머니의 묘를 모셨습니다.

둘째 : 손주와 노비를 대하는 일화
퇴계는 손주 안도가 장가갈 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넣어 줬습니다.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부 는 가장 친밀한 사이이므로 더욱 조심해야 하며 바르게 행해야 한다.

중용에서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맏손주 이안도는 안동 권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손주 며느리는

아들을 낳은지 불과 6개월여 만에 다시 임신하였는데 그나마 부족했던

젖이 나오질 않게 되어서 퇴계의 증손주(이안도의 아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증손주가 암죽으로 겨우 겨우 연명은 했지만 날로 쇠약해졌답니다.
마침 종가택(이황이 살고 있던 집)에 하녀 학덕이 출산을 했습니다.
맏손자 이안도는 할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했답니다.
‘증손주의 유모로 하녀 학덕을 보내주십시오.’

당시에는 노비는 집안에 딸린 재산 목록이었고 매매가 가능하던

시대였으며 신분은 대물림 되었습니다.

때문에 대를 이어갈 증손주에게 젖을 먹여줄 유모로

보내달라는 것은 예사로운 부탁이었지요.

그리되면 젖을 빼앗긴 하녀 학덕의 자식은 또한 굶어죽게 되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당시는 이유식이 거의 없었지요.

그런데 퇴계가 손주에게 보낸 답은 이러했습니다.

내 핏줄이 소중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네가 좌우명 처럼 읽고 배운 "

근사록"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자식을 죽여서 내 자식을 살리는 것은

몹쓸 일’이라고 가르친다.

모름지기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는 건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결국엔 굶주렸던 맏증손자 창양은 약골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두 돌이 갓 지나서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 시할아버지 퇴계를 맏손주 며느리 안동권씨는 자식을 잃고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르침과 더욱 더 존중했으며

가문의 교훈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집안 어른이 모두 죽고 남편마저(1584년) 차례로 세상을 뜨고

임진왜란까지 닥쳤을 때,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던 퇴계의

맏손주 며느리 권씨는 피난 중 퇴계의 저작물을 지키는 데 온몸을 바쳤습니다.
지금도 퇴계의 저작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건 권씨의 이런 정성 덕분이었습니다.

셋째 : 제자들을 대하는 일화

제자 중에는 퇴계 이황을 존경하여 멀리 전라도에서 스승을 찾아온

"이함형"이라는 21세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인과 사이가 안 좋아 얼굴도 마주치길 싫어했다고 합니다.
퇴계는 제자가 순천 집으로 돌아가던 날 아침상을 함께한 뒤에

반드시 고향집 사립문 앞에서 읽으라며 편지 한통을 건넸습니다.
편지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다" 하였으며"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나 그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천지의

모든 원리와 직결된다’고도 하였다.

부부의 윤리란 이처럼 중대한 것인데 어찌 마음이 서로 맞지 아니한다고

소박할 수 있겠는가?

충고하노니 자네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려 힘쓰도록 하게나.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대문앞에서 서찰을 읽어 내려간 제자!

모든 것을 부인탓으로만 돌렸던 이함형!

그날부터 아내를 깍듯이 예우하자 아내도 변했습니다.

그러자 부부는 서로를 진정 사랑하게 되었으니 놀라워라!

이듬해에 퇴계선생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암형부부는 크게 깨우침을 주시고 행복을 되찾아 주신 퇴계선생을

평생 존경했으며 퇴계선생이 죽자 통곡을 하며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례를 갖추며, 그를 추모했으며

상복을 입은 그의 부인은 음식도 극히 단식하듯이 소량만 섭취하며

사적인 즐거움을 절대 삼가했다고 합니다.

넷째 : 천민이나 평민이나 모두 공경하며 정성으로 예우하였습니다.

영주에는 배점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대장간에 심부름을 하던 십대나이의 "배순"이라는

어린 소년이 있었는데 퇴계 선생이 소수서원에서 강학할 때

강학당 밖에서 엿듣고 땅바닥에 글씨를 쓰며 공부하다가 퇴계 선생에게

들키게 되자 퇴계가 그를 제자로 거뒀습니다.
퇴계는 그의 미천한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가르쳤는데

그는 퇴계선생이 죽자 3년상을 치루며 소식을 했으며 철제로 퇴계상의

모습을 만들어 추모했다고 한답니다.
대장장이 배순은 선조왕이 죽자 역시 3년상을 치루고 첫째날과 보름날은

산봉오리에 올라가 궁궐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퇴계선생의 은혜를 잊지 않았으며 몸소 성리학을 실천했던

퇴계의 사상을 배순도 따른 것이지요.

국망봉(國望峯)은 대장장이 배순이가 궁궐을 바라보며 통곡하던

봉오리란 의미로 국망봉(國望峯)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조선 왕조에서도 그가 사망하자 추모하는 정려비를 세워줬으니

그곳 비문에는 배순이 ‘78세에 생을 마치는 날 맑은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뜰에 까마귀 떼가 내려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배점마을!

천한 백성 배순이가 대장간을 했던 곳이라 하여 "배점마을"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구전설화에는 그가 죽어 용이 되어 승천하다가 부인이 부르는 바람에

이무기가 되어 강에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가 떨어진 죽계구곡을 "용소"라고 한답니다

퇴계의 사상철학은 성(誠)과 경(敬)으로 일과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똑같이 사랑하고 공경하라"입니다’

건지산 산비탈에 있는 퇴계 묘에는 그의 사후에 왕명에 의해서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존되었으나 초라한 묘비만 서 있을 뿐입니다.

퇴계의 11세손 이만도 (1842~191O)는 25세에 과거에 장원급제 한 후

여러 관직을 지내고 국가의 국운이 기울자 1880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백성으로서 신하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면서 24일간 단식으로 순국한 지사입니다.

또한, 이만도의 아들, 며느리, 조카, 친척 여러 사람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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