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178

방랑시인 김삿갓 (200,마지막)

방랑시인 김삿갓 (200,마지막) *승피백운 우화등선 (乘彼白雲 羽化登仙) 돌이켜보면 기구하기 짝이 없었던 50 평생이었다. 그러기에 혼미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鳥巢獸巢皆有居 : 조소수소개유거)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왔노라. (顧我平生獨自傷 : 고아평생독자상) 짚신에 지팡이 끌고 천릿길 떠돌며 (芒鞋竹杖路千里 : 망혜죽장로천리)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水性雲心家中方 : 수성운심가중방)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 되어 (尤人不可怨天難 : 우인불가원천난) 해마다 해가 저물면 혼자 슬퍼했노라. (歲暮悲懷餘寸腸 : 세모비회여촌장) 어려서는 이른바 넉넉한 집에 태어나 (初年有謂得樂..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9) *歸天 (귀천)

방랑시인 김삿갓 (199) *歸天 (귀천) 보은산은 남향이어서 산속이 유난히 따뜻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산속에서는 어느새 진달래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김삿갓은 진달래 꽃 봉오리가 터진 것을 발견하자, 오랫동안 몸 속에 잠재해 있던 방랑벽이 별안간 가슴이 설레도록 용솟음쳐 올라왔다. (아아, 나도 모르게 어느새 대지에는 봄이 왔구나. 나도 이제는 방랑의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왔구나 ! ) 김삿갓은 무의식중에 그런 충동이 느껴져, 진달래꽃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안 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봄이 왔으니, 나도 이제는 길을 떠나야 하겠소이다." 그리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작별시를 한 수 써 보였다. 먼 나그네 오랫동안 병을 빙자하여 댁에 폐를 끼치며 봄을 맞았소 봄이 와서 동서로 뿔뿔이 헤어지면 ..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8)

방랑시인 김삿갓 (198) *연연납월 십오야, 헌관집사 개고알 (十五夜,, 乃自知, 用刀疾, 皆告謁) 이라는 주막에서 우국지사와 마지막 작별을 나눈 김삿갓은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강진에 있는 안복경이라는 사람을 찾아 가기로 결심하였다. 진주에서 강진 고을까지는 몇백 리가 되는지, 김삿갓은 정확한 거리를 모르지만, 마음 놓고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는 아무리 멀더라도 따듯한 곳을 찾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병이 워낙 심상치 않은데다가, 우국지사를 만나 밤샘을 해가며 폭음을 한 탓인지,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게다가 날씨조차 갑자기 추워져서, 사지가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이거 큰일났구나. 몸이 이래 가지고야 하루에 10리 인들 걷겠나 ?)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김삿갓은 날이 갈수록 몸이 ..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7)

방랑시인 김삿갓 (197) *남아하처 불상봉 (男兒何處 不相逢 : 오래 사노라면 어디선가 다시 만나는 운명) 어느덧 진주에 도착한 김삿갓은 우선 촉석루(矗石樓)부터 찾아 갔다. 진주성 남쪽 벼랑 위에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촉석루는 그 아래로는 남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강 건너편 우거진 대나무 숲은 바람이 불때 마다 우수수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대나무 숲이 끝나는 강가에는 하얀 모래밭이 길게 연결되어 있어, 자연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살아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왜적과 우리 관군이 피아간에 운명을 걸고 싸운 가장 치열했던 격전장이었다. 왜적이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 왔었지만, 전라 병사 황진(黃進)과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와 의병장 김천일 (金千鎰) 등이 전력을 기울여..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6)

방랑시인 김삿갓 (196)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김삿갓이 물에 빠져 죽은 스님을 형식적으로나마 장사까지 지내 주고, 첩첩 산중으로 또다시 걸어가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어디선가 늙은이가 대성 통곡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아이고 ...이 무정한 친구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던 자네가 나를 내버려 둔 채 혼자만 가버렸으니 이 무슨 기가 막힌 일이란 말인가 ! " (응 ? 이게 무슨 소릴까 ?) 김삿갓은 길을 가다 말고, 귀를 유심히 기울여 보았다. 저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넋두리는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김삿갓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부랴부랴 달려가다가 너무도 뜻밖의 광경에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높다란 벼랑 아래 풀밭에는 뼈와 가죽뿐인 호호백발 노..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5) *김삿갓의 기행.

방랑시인 김삿갓 (195) *김삿갓의 기행. 지리산은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있는 엄청난 산으로 둘레에는 크고 작은 10여 개의 고을들이 산재해 있다. 남원은 서쪽에 해당하고, 함양(咸陽)은 북쪽 고을이고, 진주(晉州)는 남쪽 고을에 해당한다. 이렇듯 크고 넓은 산을 넘자니 다리가 불편한 김삿갓으로선,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산허리를 걸어 넘어 진주 방향으로 길을 접어들었다. 그 옛날 진시 황제 시절, 중국 사람들은 초(草)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쌍을 동방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삼신산의 하나였던 방장산(方丈山)이 바로 오늘날의 지리산인 것이다. 지리산은 산이 높고 골짜기들도 하도 복잡하기 때문에, 옛날부..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4) *남원 광한루에서..

방랑시인 김삿갓 (194) *남원 광한루에서.. 김삿갓이 남원 고을 광한루(廣寒樓)에 도착한 때는, 삼복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고 모두들 광한루로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삼삼오오 여기저기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질탕하게 놀고 있기도 하였다. 광한루는 그 옛날 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을 속삭이던 본고장인지라, 어디에서나 의레 들려 오는 노래는 이 아니면 뿐이었다. 이렇게 광한루 주변은 한량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어서, 김삿갓은 어디를 가거나 술은 공짜로 얻어 마실 수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한 해 여름을 태평 세월로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김삿갓은 술을 공짜로 얻어먹는 대신에, 술좌석에 흥을 잘 돋워주..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3) *처량한 신세의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93) *처량한 신세의 김삿갓. 전주를 돌아 본 김삿갓은 남원(南原)으로 발길을 돌렸다. 성춘향(成春香)과 이몽룡(李夢龍)의 설화(說話)가 서리서리 얽혀 있는 광한루(廣寒樓)와 오작교(烏鵲橋) 등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원은 지리산 기슭에 위치한 곳인지라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도가도 인가를 찾아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김삿갓은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신세인지라, 인가가 없는 것처럼 딱한 일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몸이 불편해 오는데다가 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니 길은 더딜밖에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밥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뱃속에서 울려오는 쪼르륵 소리를 들어 가며 진종일 인가를 찾아 헤맨 일도 있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은..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2) *전주(全州) 에서 ...

방랑시인 김삿갓 (192) *전주(全州) 에서 ... 비몽사몽간에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어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는 아까 만났던 김진사가 서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광경이어서 김삿갓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이런 곳에 어떻게 오셨소 ? " 그러자 김진사는 용서를 비는 어조로, "조금 전에 선비가 내 집 대문에 써놓은 시를 읽어 보고 찾아왔소이다. 요사이 거지 떼가 하도 많아 나는 귀공도 거지인 줄 알고 쫒아냈던 것이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으니 용서하시오." 김삿갓은 품고있던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한번 쫒아 버렸으면 그만이지, 뭤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는냐 말요 ! "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김진사는 가볍게 웃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귀공이 나를 나무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 그러..

야화 김삿갓 2021.09.30

방랑시인 김삿갓 (191)

방랑시인 김삿갓 (191) *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 :죽으면 이런 멸시는 안 당할 텐데, 몸이 있는 것이 평생 원한이로다) 관촉사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내려오면, 풍계촌(風界村)이라는 마을에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甄萱)의 무덤이 있다. 견훤은 신라의 비장(裨將)이었는데, 진성왕(眞聖王)때, 따르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를 일으킨 풍운아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 금강(金剛)과 신검(神劍)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나라를 세운지 41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견훤의 초라한 무덤만이 적막한 산속에 쓸쓸히 남았으니, 인생의 영고성쇠란 본시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와, 익산군(益山郡..

야화 김삿갓 2021.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