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13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53) <남산골 점집>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53) 허불도사가 육갑을 짚어보는데 점을 보러온 선비가 도사 부인을… 땅거미가 스멀스멀, 남산골 골목에 내려앉았다. 갓을 눌러쓴 건장한 선비 한사람이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 어느 대문 앞에 다다랐다. 기둥 위에 늘어진 노끈을 당기자 짤랑짤랑 집안에서 방울 소리가 났다. 대문 기둥에 걸린 ‘占(점)’이라는 글자가 박힌 초롱이 바람에 흔들렸다. 선비를 맞이한 사람은 박가분 냄새가 퍼지는 젊은 여인인데, 엉덩이 윤곽이 드러나게 허리끈을 바짝 내려 매고 분홍색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색기를 내뿜는다. 허불도사가 좌정하고 있는 사랑방으로 들어간 선비가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흰 수염이 성성한 허불도사가 “임자, 마숙차 한잔 내오시오.” 외치자 소반에 차를 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색..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52) 보쌈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52) 보쌈 긴 세월 보부상 남편 기다린 홍씨 어느날 아들에게 소식을 듣는데… 깊은 산골 외딴 너와집에 가물가물 관솔불이 켜 졌다. 방과 부엌 사이 흙벽을 뚫어 그 사이에 관솔 불을 켜니 방과 부엌이 동시에 밝아졌다. 희미한 등불 아래 저녁상이 차려졌다. 이상한 것은 식구는 셋뿐인데 밥그릇은 넷이요. 수저도 넷이다. “오매, 언제까지 밥그릇 하나 더 차릴 겁니꺼?” “너거 아부지 올 때까지.” “아부지 집 떠난 지 십팔년이 됐슴니더,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티끌만한 소식이라도 있을긴데.” “시끄럽다.” 어머니가 말을 잘랐다. 저녁상을 치우고 나자 어머니는 관솔불 아래서 바느질 바구니를 펼쳤고 열여덟살 아들은 윗방으로 갔다. 부엌에서 뒷물을 한 며느리는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안방과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51) <천도재>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51) 심마니 삼복이와 말 못하는 칠석이 사이좋게 약재 캐러 산에 갔는데… 첩첩 산속 곰솔골에는 화전민 다섯집이 살고 있었다. 사촌이 이들보다 가까울까? 형제간이 이들보다 가까울까. 둔촌네 둘째 아들 삼복이는 심마니로 산속을 헤매며 가끔 심도 보고 하수오와 상황버섯도 따고 석청도 채취해 대처로 나가 팔았다. 옆집에 사는 칠석이는 삼복이보다 세살 아래로 벙어리다. 장날이면 대처에 나가 외상술을 마시고 툭하면 행패 부리기 일쑤라 그 아버지가 뒷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어느 날, 삼복이가 장터에서 또 행패를 부리는 칠석이를 뜯어말린 뒤 주막으로 데려갔다. 원래 벙어리는 말을 못하지만 남의 말을 들을 줄은 아는 법. 둘은 술을 잔뜩 마시고 곰솔골로 돌아왔다. 이튿날부터 삼복이가 칠석이를..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50)<마름>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50) 벼가 누렇게 익기 시작하면 마름의 끗발은 하늘을 찌르는데… 나는 마름 할라우. 나도 마름 하겠수. 나도 마름. 나도 마름. 대체 마름이 뭐기에 모두가 평양감사를 팽개치고 마름을 하겠다는 건가. 마름은 지주를 대신해 소작농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 자리가 뭐 그리 대수인가? 모르는 소리. 몇마지기 논이나 밭뙈기에 매달려 사는 소작농에게 마름은 저승사자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다. 벼가 누렇게 익기 시작하면 마름의 끗발은 하늘을 찌른다. 마름은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이 논은 나락 한섬 세가마.” “저 논은 나락 두섬.” 소작료를 매기는 것이다.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소작농은 마름의 두루마기 자락을 잡고 “아이고 나으리~, 이 논에서 한섬 세가마를 바치면 ..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9)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9) 돌암과 춘화 숙경부인이 된 삼패기생 춘화 이진사가 된 푸줏간 돌암이 강원도 영월에서 만났는데… 삼년 전 강원도 영월 땅 아담한 기와집으로 한 부인이 열대여섯 되는 딸 하나와 몸종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이웃과 왕래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기껏해야 명절 전 대목장에 가느라 대문을 나서지만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 민모습을 본 사람 이 없다. 그러나 기품 있는 귀부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궁금증만 더해가, 남편이 귀양을 갔다느니 친정집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다느니 온갖 뜬소문만 난무했다. 딸은 그 어미보다는 동네 출입이 잦았다. 몸종과 함께 들판에 가서 봄나물을 뜯기도 하고 동강 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보기도 했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피어오르는 꽃..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8)<매형>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8) 호의호식하던 천석꾼 유 진사 어느날 탁발승과 맞닥뜨리는데… 유 진사가 점심 수저를 놓고 솟을대문 밖으로 나갔다. 뒷짐을 지고 발아래 펼쳐진 황금 들판을 내려다보니 빙긋이 입이 벌어졌다. 그때 지나가던 한 탁발승이 삿갓을 푹 눌러쓴 채 “쯧쯧쯧, 운세가 정점을 찍었구랴!” 탁발승은 유 진사에게 이끌려 사랑방에 앉았다. “여봐라, 여기 곡차를 올리렸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몇순배 청주를 돌린 뒤 유 진사가 물었다. “정점을 찍다니요? 이제는 내려갈 운세요?” 스님은 여전히 삿갓을 눌러쓴 채 “하강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절벽에서 떨어지듯이 급전직하하겠소이다.” 유 진사가 너털웃음을 짓더니 “땡초가 못하는 말이 없네.” 문을 발로 차며 “여봐라, 하인들을 모두 모이도록 하..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7) <노참봉>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7) ‘정력절륜’ 다섯 첩 거느린 노 참봉 돈 모으는 재주 또한 남다른데… 노 참봉은 첩을 다섯이나 거느린 정력절륜(精力絶倫)의 영감이다. 키는 5척 단신이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허벅지가 또래 친구들의 몸통만큼 튼실하다. 하수오·사향으로 환을 만들어 장복하고 삼지구엽초를 달여서 차 마시듯 하니 절륜할 수밖에 없다. 그가 실전에 뛰어난 것은 이론도 탄탄하기 때문이다. 을 필두로 중국 왕실의 방중술에 대한 책을 모조리 탐독했다. 물건 큰놈이 코도 크다는 옛말도 바로 노 참봉을 두고 한 말이다. 코는 물건처럼 생겨서 큰데다, 코밑 수염은 턱까지 덮어 그것으로 남근을 대신하니 접하기 전에 여자들의 숨이 넘어가는 것이다. 노 참봉은 자기와 방사를 치른 여인은 절대로 다른 남자 품에 안..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5)<골패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5) 천하의 노랑이 황첨지 머슴살러 들어온 억보에게 골패를 가르치더니 점점 내기가 커지는데… 황 첨지는 천하의 노랑이다. 제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자물통을 꽉 채워 땡전 한푼 나오는 법이 없다. 황 첨지는 머슴이 몸이 아파 일하지 않는 날은 치부책에 일일이 적어놨다가 세경을 깎았다. “첨지 어른, 이틀째 앓아누워 일을 못한 건 맞는데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깝니까요?” 머슴이 물으면 “네놈 때문에 파종이 이틀 늦어져 소출이 많이 줄었어!” 이런 소문이 퍼져 더 이상 황 첨지네 집에 머슴 살겠다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리숙한 젊은이 하나가 제 발로 찾아왔다. 좀 모자란 듯이 항상 비실비실 웃는 ‘억보’라는 청년인데 어깨가 떡 벌어져 일은 잘했다. 비 오는 날..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4) 귀신이 살고 있다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4) 귀신이 살고 있다 오 대감네가 숙부 상 치르는 사이 외동아들은 밤중 몰래 빠져나와 잠든 침모의 방문을 두드리는데… 오 대감의 숙부가 상을 당해 9일장을 치르느라 대감집 하녀와 찬모까지도 이십리 밖 상가에서 땀을 흘리고, 넓은 상갓집 이방 저방에 쓰러져 잠들기를 벌써 엿새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날 밤, 오 대감의 열여덟살 외동아들은 도롱이를 쓰고 상가를 빠져나가 이십리 를 걸어 제집으로 갔다. 그 집에는 늙은 행랑아범과 침모뿐이다. 그는 행랑아범을 깨우지 않고 담장 밖 감나무 가지를 잡고 훌쩍 담을 뛰어넘어 곧장 침모 방으로 다가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침모, 급히 상복 하나를 만들어야 쓰겄소. 여기 안동포 한필 가져왔소.” 잠을 자던 침모가 문고리를 벗기자 바람..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3) <보쌈>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3) 청상과부로 수절하던 ‘박실댁’ 어느 날 매파가 찾아오는데… 박실댁은 시집가서 한해도 지나기 전에 덜컥 신랑이 죽어 눈물로 삼년을 보냈다. 또 한숨으로 삼년을 보내고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며 삼년을 보내도 망할 놈의 세월은 굼벵이 귀신을 덮어 썼는지 제 나이 이제야 스물여덟살밖에 되지 않았다. 친정도 양반집이요, 시집도 뼈대 있는 대갓집이라 재혼이란 생각도 못할 처지였다. 더군다나 시아버지가 고을 원님을 구워삶아 육년 전 단옷날 박실댁에게 효부상을 내리고 은비녀와 함께 은장도를 상품으로 안겨버렸다. 박실댁이 시집은 꿈도 꾸지 못하게 족쇄를 채워버린 셈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시어머니가 이승을 하직하자 이듬해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를 따라가 정신없이 삼년상을 치르고 나니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