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방랑시인 김삿갓 1-10

우현 띵호와 2021. 9. 25. 23:11

방랑시인 김삿갓 1-10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紹介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묘;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출생~사망; 1807 ~ 1863
-본관; 안동
-호; 난고
-본명; 병연
-별칭; 김삿갓
-자; 성심
-활동분야;문학
-출생지;경기 양주
-주요저서;《김립시집》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

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 (1) *밝혀진 집안 내력의 비밀.
어머니로 부터 조부(祖父) 김익순에 대한 내력을 듣게된 병연(炳淵)은

비틀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벽을 바라보고 꿇어 앉아 ,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듯 고개를 꺽고 있었다.
희미한 등잔불은 가끔씩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여보, 밤이 깊었어요."
남편이 평소와 전혀 다른 ,실성한 모습으로 벽을 향해 앉아 있자,

병연의 아내도 물끄러미 앉아 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늘 집에 오실때 백일장에 참례하여 장원급제 하셨다고 좋아 하시더니" ..
병연의 아내는 불과 한 시각 전에 남편 모습이

어머니 방을 다녀 온 후 돌변한 것이 의아 했다.
그러나 병연은 대답이 없었다.

"여보, 어서 자리에 드세요."
아내가 다시 말하자 병연은 그제서야 아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잔불로 어두운 방안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알수 있었다.
​"당신 아직까지 자지 않았구료."
"당신이 그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잠자리에 들 수 있겠어요."
"그렇군 ,내 미안하오."
자조섞인 말투로 대답한 병연은​ 다시 아무 말없이 공연스레 고개를 몇번 끄덕이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아내에게 감추려는 듯 다시 시선을 천정을 향했다.
그리곤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천정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보 !"
남편의 부름에 아내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얼굴과 시선을 병연의 등뒤로 향했다.
"오늘, 내 당신을 앞으로 고생 시키지 않고 호강시키리라 생각되더니

모두가 허사가 된것 같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남편의 다정한 말을 듣자 더욱 궁금한 아내가 가슴 떨려하며 되물었다.
"장원급제의 기쁨도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소, 벼슬길도 이제 아득하게 멀어지고..
아까 부터 , 모든 것이 헛된 꿈이요 뜬구름을 쫒는 신세가 된 기분이오."

"저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내의 궁금증은 다시 입을 다물고 있는 병연의 모습으로 더욱 커졌다.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오."
아내가 뒤이어 아무말 없자 병연은 한참후 입을 열었다.

"오늘, 백일장에 시제는 논공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 , 嘆金益淳罪通于天) 이었소."
"제가 그런 어려운 글을 아나요" ..

아내가 이렇듯 대답하자 병연은 당연하듯 고개를 몇번 끄덕인후 다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입을연 병연은,

"그 시제로 장원이 되었으나 알고보니 내가 절절히 탄핵했던 김익순이 사실은 나의 조부였소."
병연의 아내는 이제서야 남편이 그토록 괴로워한 까닭을 헤아린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하오 , 당신을 고생시켜서" ..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남편의 말을 들으니 병연의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여보,저..."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무슨 말이오?"
병연은 천정을 쳐다본 채 물었다.
아내는 몇번인가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아기를 가진것 같아요."
"아기를?"
병연은 이제서야 아내를 향하여 돌아서며 자세를 고쳐 앉아 아내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병연이 마주보자 아내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깊게 떨구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한동안 아무말 없이 바라보던 병연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생각해 보면 백일장에서 장원급제 하였겠다,아내는 태기가 있겠다.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 인가 ?
그러나 병연에게는 기쁨보다 슬픔이 앞섰다.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미천한 아비로 인해 신분이 제한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기에 아내의 말을 듣고도 기쁨에 앞서 가슴만 더욱 메어왔다.
병연은 아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뜨거운 눈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차라리 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병연은 밤새 한잠 못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해가 산마루를 넘어왔다.
사립문 밖으로 나온 병연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새벽 안개속에 묻힌듯 뿌옇게 보였다.
어제 이시각의 병연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소생하는 만물처럼 야심찬 사나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속은 희뿌연 재만 남고 희망도 용기도 없는 타락한 몰골이었다.
잡목 숲을 얼마나 걸어다녔는지 모른다.
병연은 심한피로감을 느꼈다.
"아 .."
무거운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는 잠이들어 있었다.
잠들었다기 보다 허탈감이 주는 공허함에 가사상태였다.
종달새 한마리가 하늘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병연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해는 이미 중천 높이 솟아 있었고 봄볓은 따사롭게 움트는 나뭇가지를 비추고 있었다.
넋을 잃고 망연히 눈앞에 펼쳐진 봄풍경을 바라보던 병연은 문득 당시(唐詩) 한 수가 떠올랐다.
초색청청 유색황 (草色靑靑 柳色黃) , 도화력난 이화향 (桃花歷亂 梨花香)
동풍불위 취수거 (東風不爲 吹愁去) , 춘일편능 야한장 (春日偏能 惹恨長)
풀빛은 푸르나 버들은 아직 황색인데 , 복사꽃은 만발했고 배꽃은 향기롭네

동풍은 나의 시름을 불어내어 갈 줄 모르고 , 봄날은 한도 많고 길기도 하여라.
지금 처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시였다.
그렇다 , 이 화창한 봄날은 그에게는 한도 많고 지루하도록 길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문득 단시 한 귀절이 떠 올라 읊조리는데
만사 개유정 (萬事 皆有定) , 부생 공자망 (浮生 空自忙)
모든 일은 운명에 따라 정해지건만 , 사람이 공연히 떠돌며 찾는구나.

 

방랑시인 김삿갓 (2) *병연의 방랑준비.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병연에게는 시야 말로 생의 전부였다.
애써 생각치 않아도 시상(時想)은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지금까지는 입신출세를 해보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자신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었고 문장을 가다듬고 주변에 보이는 모든것에 시작(時作)을 붙였다.
하지만 출세가 뜬구름이 된 지금 , 문장이 무슨 소용있으며 시 또한 무슨 필요 있단 말인가.

폐족의 낙인이 찍혀 있는 마당에 시를 해서 무엇한단 말인가.
자괴감에 싸여 며칠을 고민을 거듭하던 병연, 뜬구름 같은 인생, 모든것을 떨쳐버리고
자연에 묻혀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 하면서 주유천하 (周遊天下)로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병연은 자기의 결심을 실행하기에 앞서 소년시절부터 자기를 깨우쳐준 서당의 스승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올리리라 마음 먹었다.

"허어 , 병연에게는 더 가르칠것이 없구나 너를 가르치기엔 나의 글이 너무 짧구나."
스승은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공부가 깊어갈수록 병연의 깨우침이 스승을 앞섰고
이제 그 결과로 백일장 장원을 하였으니 즉시 스승님을 찾아 뵙는것이 도리이지만
어지러운 심경 탓도 있고 급제한 바를 떳떳하게 자랑할 처지도 못되었기에 당장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오르게 되면 언제 다시 뵐수 있을지 알수없는 일이라
떠나기전에 인사라도 올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서당이 있는 아랫 마을로 내려갔다.

"스승님 !"
방안에서는 학동을 가르치는 스승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냐 ?"
"저 병연이옵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학우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자네 이제 왔는가 ?"
학우들이 그를 반기는데 ,병연의 장원급제 소식을 뻔히 듣고있던 터에

조금 늦게 나타났다는 질책어린 대답이었다.

병연은 말 없이 방안으로 들어가 스승께 큰 절을 올렸다.
"일찍 찾아 뵈오려 하였으나 신병으로 늦었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병연은 하는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래 ? 많이 아팠더냐 ? 그래 지금은 괜챦느냐?"
스승은 병연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병연의 병을 염려하였다.
"네 지금은 염려하신 덕에 거의 낳았습니다."
"허허헛, 장원급제를 하더니 너무 기쁜 나머지 병을 얻은 모양이다.
거의 다 낳았다니 마음이 놓인다."

스승은 자기 문하에서 장원급제가 나왔으니 여간 즐겁지 않았다.
연실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병연을 바라보며 마냥 만족해 하였다.
"우린 그런줄도 모르고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

오늘도 소식이 없었으면 자네 집으로 올라갈  참이었네. 그나저나 자네의 장원급제를 축하하네."
그제서야 동문수학 하던 친구들이 저마다 나서며 병연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정말 고맙네. 내가 재주가 있다기 보다 평소에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은덕이고
학우들이 도와준 덕분일쎄."
병연은 이렇듯 답례를 하였지만 친구들의 축하가 여간 거북스럽지 않았다.
"백일장 다음날 읍내에 나갔더니 저자거리나 주막거리나 할 것 없이 장원급제한 선비 이야기로
들끓더군.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어떤 사람은 자네가 산신령의 화신이라고
까지 말을 하더군."

학우의 이 말에 병연은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이번에는 스승이 한마디 하셨다.
"내력을 알 수없는 젊은이가 당당히 급제를 따냈으니, 뒷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쯤 출사하기로 하였느냐 ?"
"아직 결정된 것은 없으나 미구(未久)에 있을것으로 압니다."
병연은 대답을 아니 할수도 없어 생각되는 대로 말했다.

"매우 장한 일이다. 이제부터는 네 앞 길이 열려있는 셈이다. 더욱 정진하도록 하여라."
스승은 정색을 하고 병연을 훈계했다.
"예"
병연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 뿐,
학우들이 서둘러 병연을 위한 축하연을 베풀었다.
처음에는 스승님을 모셔놓고 주안상을 벌였지만 스승님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면서 부터
젊은이들 판이 되었다.

"여보게 병연이. 자네 벼슬길로 나아 가더라도 우릴 괄시해선 안되네.

우리들이야 천자문에 명심보감 몇줄이나 읽고 쓰다, 곧 집어치울 팔자가 아니던가?"
"엑끼 이사람들아 !"
술이란 좋은 것이다. 술 몇잔을 마신 병연은 어느새 조금전 까지 침울했던 기분에서 벗어나
차차 호기를 되찾고 있었다.
"읍내에는 기생도 많지 않은가 ? 자네는 젊고 잘생긴데다 글까지 일필휘지(一筆輝之)로

통달하였으니 기생은 마음대로 골라잡아 놀수 있겠구먼."
"그야 물론이지. 출세하면 권세는 물론이요. 계집은 자연히 따르는 법,

그래서 모두들 출세하려고 발버둥 치는것 아니겠나.? 자네도 병연이가 부럽거든 어서 장원급제를 하게."
학우들은 마음껏 마시고 떠들었다.
병연도 오랫만에 가져보는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병연은 학우들의 얼굴을 하나씩 , 처음보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오늘 헤어지면 평생 다시 만날것 같지 않아서였다.
(아니 모르지 ..바람따라 떠돌아 다니다가, 먼 훗날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수 있을지..? )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밀려왔다. 그것은 훗날 다시 만날지도 모를 이 친구들, 오늘의 젊은은 간곳 없고
서로 늙고 피곤한 모습으로 상봉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어서였다.
축하연은 날이 저물어서야 끝났다. 병연은 많은 잔을 마셨지만 좀체 취기가 돌지 않았다.
헤어질 때 병연은 학우들의 손을 일일히 잡으며 조만간 있을 이별에 서러운 마음을 담으며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병연은 그동안 보아오던 책을 정돈하여 깊숙히 처박았다.
그의 야망을 북돋아 주던 책들이었다. 병연은 이렇게 ,지난시절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와
작별하는 심정으로 책들과 작별을 나누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3) *집을 떠나는 김삿갓.

이제 언제 떠날 것이며 유랑의 길을 어떻게 잡느냐만 남았다.
(떠나기로 결심한 바에야 봄이 가기전에 떠나도록 하자.

봄바람을 타고 발길 닿는대로 가면 되지 않겠냐.)

생각이 이렇게 굳어지자 내일이라도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금강산도 보고싶고 구월산도 보고싶고,

할아버지가 봉직했다는 선천 땅도 밟아 보고 싶었다.
선천땅에 가면 할아버지의 체취를 맡을수 있을리란 막연한 생각도 함께 들었다.
병연은 떠날준비를 서둘렀다.

사실 , 돈을 가지고 유람을 가는것도 아니라서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지만 ..
싸리나무로 삿갓을 만들었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 보면 심한 바람도 만날 것이오 , 줄기찬

비도 맛게 될것 이오, 때로는 눈보라도 닥칠 것이니 이것들을 다소라도 이겨내려면 삿갓이
안성맟춤일 것 같았다.
삿갓은 삼일만에 커다랗게 만들어졌다.
그는 우선 머리에 써보았다.차양이 널찍하여 하늘을 가렸다.
또 깊숙이 눌러 쓰니 땅밖에 보이지 않아 누군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삿갓아, 너는 오늘 내 손에서 태어났으니 영원한 친구가 되겠구나. 너는 내 머리위에 올라 타

나보다 더 멀리, 더 빨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즐거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는 삿갓을 어루만지며 쓸쓸하게 말했다.
다음으로 그는 단단한 박달나무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다.
지팡이와 삿갓하나, 이것이 그가 가지고 떠날 모든 것 이었다.
그날밤 병연은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여보, 그래.. 뱃속에 아기는 잘 자라고 있소 ?"

병연은 내일 일찍 떠나리라 마음 먹고, 마지막으로 아내를 사랑해 주고 싶었다.
병연은 시집와서 자나 깨나 일 밖에 모르는 온순한 아내가 오늘이 지나면 생과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르자 , 안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내는 남편이 갑자기 정답게 말을 걸어오자 오히려 온 몸이 떨려왔다.
책밖에 모르던 남편이 아니었던가.
병연은 아내의 배를 만져 보았다. 아내는 부끄러운듯 몸을 꼬았다.

"그래 .. 이 속에 우리 아기가 있단 말인가?"
"아이 당신도 ....."
아내는 숨을 색색 내쉬었다.
"하늘이 점지해 주신 생명이니 잘 키워야지. 한데 여보,

내가 없더라도 아기는 잘 키워야 하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달콤한 흥분에 취해있던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음..나 바람이나 쏘이고 싶구료. 새 처럼 세상을 훨훨 날아보고 싶소."
말을 한 병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집을 떠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글쎄 바람부는 대로 돌아다니고 싶소."
"당신 답답한 심정은 저도 알아요. 울적하신 판이니 바람을 쏘이셔도 좋겠지요.
하지만 집을 영영 떠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내는 남편이 아주 집을 나가 버릴까 염려되는 모양이다.
"당신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달리 생각 하리오 ? 내 답답함을 풀겸 ,
천하를 두루 유람하다가 돌아오리다."
아내를 안심 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을 했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인가는 자신도 기약할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잠시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돌아오도록 하세요."
" ......"
병연은 말이 없었다.

비록 빈 말 이라도 그러마 하고 자신있게 대답하기에는 어딘가 가슴이 찔렸다.
"염려말아요." ..
병연은 망설이다가 겨우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책임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병연은 아내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손을 뻣어 ..
아내의 목덜미 부터 가슴과 봉긋해진 배와 ,둔부까지 더듬으며 쓸어 내렸다.
병연의 부드러운 손이 스칠때 마다 아내의 몸은 새삼스럽게 놀란듯한 반응이 손 끝에 전해졌다.
갖 이십을 막 넘긴 아내의 몸은 보드랍고 탄력있었다. 유방은 엎어놓은 사발처럼 솟아 올랐고

그 한가운데는 솟은 유두가 종의 추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얕은 모래언덕같은 둔부로 손이 가자 아내는 부끄러워 어쩔줄 모르고 몸을 비틀며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까지 얕게 뱉었다.
병연이 몸을 반쯤 일으켜 아내의 양 허벅지에 손을 넣어 다리를 벌리고 정상위 자세를 취하자
아내는 병연의 가슴을 양 손으로 막으며 작게 속삭였다.
"안되요.."
병연은 난감했다. 그러면서 일편, 아내의 제지에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이미 봉긋하게 솟아 오른 아내의 배를 압박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과
어떤 방식으로 아내와 사랑을 나누어야 할것 인지, 자신은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시 아내의 세운 무릅 ,발끝에서 멈칫했던 병연..
그의 아내는 이런 병연의 모습을 즐기고 있는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그녀는 병연에 팽창한 그것을 한 손으로 곱게 잡았다.
그리고 자기 앞으로 천천히 끌어 당겼다.
그는 그녀가 이끄는대로 얌전히 두 무릅을 꿇고 끌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속으로 인도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아침 상을 물릴 때쯤 병연은 어머니께 자기 뜻을 말했다.
"어머니, 저 바깥 세상 구경이나 좀 할까 합니다."
어머니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니 좀 돌아 다니는 것도 괜챦을 것이야,
그래 어디로 갈 셈이냐 ?"

병연은 어머니가 선뜻 응락 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금강산을 들려볼까 합니다."
"가볼만한 곳이지. 그러나 길이 험하다고 들었으니 각별히 몸조심 해야 할것 이다."
"네, 말씀하신대로 조심하지요. 또 젊은 몸인데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언제 떠날 셈이냐 ?"

"오늘 떠날까 합니다."
"오늘 ?"
어머니는 의아한 양 물었다.
"예"
"먼 길을 떠나자면 준비해야 할것도 있으려니와 오늘로 되겠느냐 ?
또 얼마쯤 노자도 마련해야 할것 이어늘 .."
"노자를 가지고 여유롭게 떠날 처지가 아니오니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지내볼까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더이상 말이 없었다.
어차피 아들에게 노자를 마련해 줄 형편이 아니고 보니, 아들의 뜻에 맡기는것이 오히려
편할 것 같았다.

"내 네 마음을 알아 만류하지 않는다만, 여름이 되기전에 돌아 오도록 하여라."
"예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병연은 즉시 행장을 차렸다. 무명 두루마기를 걸치고 삿갓을 쓰고 박달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어머니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뜰 아래서 어머니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옆에 서있는 아내에게도 눈길을 돌려 얕트막히 말했다.
"당신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병연은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사립문을 나섰다.
형 병하와 동생 병호가 사립문 밖까지 따라나왔다.
"형님 이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병연아 그런 말 하지 말고 가서 마음이나 안정 시키고 돌아 오너라.

그리고 이건 몇푼 안된다만 곤란할때 쓰도록 하여라."

형님은 이러면서 엽전 몇닙을 병연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연은 거절하기가 어려울것 같아 받아 넣었다.
병호가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을 연신 껌뻑이며 형에게 인사를 했다.
"형님 속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몸조심하세요."
"그러마, 어머니 잘 받들고 네 형수도 잘 보살피거라."
사립문 밖에서 병연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마음을 모질게 먹고 첫 발걸음을 떼기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쏜살같이 숲속길로 빠져 나갔다.

"형님 " ..

동생 병호의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렸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렇게 병연의 방랑은 시작 되었다.

"이제 내 이름은 병연은 저 구름에 실어 흘려 보내자. 이제부터 내 이름은 삿갓 이다.
김삿갓, 불러보니 그럴듯도 한 이름이구나, 하하하 ...."

병연, 아니 김삿갓의 너털 웃음은 봄바람 타고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는 마을 어귀를 휘돌아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라는 곳도 없고 가야할 곳도 없기에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발이 아프면 쉬고 ,피로하면 양지 바른곳에서 자면 그만이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4) *방랑의 시작.

따듯한 봄 볕을 받으며 김삿갓은 망연히 북쪽으로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던지 .. 야산 기슭이 끝나고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골에만 살던 그는 넓은 들판을 보니, 일순 가슴조차 뻥 뚫리는것 같았다.

논에서는 농부들이 한창 모내기를 하고 있었고 ,어디선가는 농악 소리도 들려왔다.
김삿갓은 구성진 못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모내기를 하고 있는 두렁길에 발길을 멈추고
구경을 하였다.

농군들은 못줄 넘기는 소리와 함께, 빠른 손 놀림으로 신명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만히 서서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새참거리라도 얻을수 있을까 생각하며
해를 쳐다 보니, 오시(午時)는 지난듯 하고 .. 얼추, 새참이 나올 시간이 임박해 보였다.

농사철이 되면 농군들은 하루 다섯끼를 먹는다.
아침 조반을 마치고 들에 나가면 점심전에 막걸리가 나오고, 다음으로 점심을 먹게되고
저녁전에 국수를 곁들인 술이 나온다.

"음..농사철이라 음식이 흔하겠구나."
김삿갓은 입맛이 먼저 다셔졌다.
집을 떠나 올때 이미 아침은 설친채 줄곧 걸어왔으니 시장기가 느껴질 법도 하였다.

그는 농부들의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못 줄을 잡은 사람이 선창을 하면 모심는 사람들은 대꾸를 하였다.
어라뒤야 상사뒤야 여보소 농군님네 얼마나 남았나.
문전옥답 서마지기 반달만큼 남았네.
어라뒤야 상사뒤야 여보소 농군님네들 ~
이농사 잘지어 풍년가 불라치면 ..

어라뒤야 상사뒤야 풍년이들면 뭣하겠소 ..
한양가서 비단사서 우리님 곱게 입혀보세~
어라뒤야 상사뒤야 ..

신명나는 일 소리를 들은 김삿갓은 저절로 어개가 들썩 거려졌다.
그도 논으로 당장 뛰어들어 그들과 같이 어울려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이때 마침 아낙네들이 커다란 함지박을 이고 논두렁 길을 걸어왔다.
"이크, 새참이 나오는구나."
자기를 대접하려고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기가 든 김삿갓은 무엇보다 반가웠다.

"자, 쉬었다 합시다."
못 줄잡이가 줄을 높이 쳐들며 새참이 나왔음을 알리자 엎드려 있던 농군들이

일제히 허리를 펴며 흙탕물에 손을 흔들어 씻고,

하나씩 아낙네 들이 새참을 차리는 논두덕으로 나왔다.

아낙네들은 그릇 그릇 넉넉한 국수를 담아냈고,

막걸리 동이에는 표주박도 띄워 놓았다.
이를 바라 보던 김삿갓은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리곤 그쪽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며 주위를 끌기위해 우선 한마디 내던졌다.
"거 농부가 한번 구성지고 신명납니다 그려, 허허허 ...."

농군들은 일제히 그를 돌아다 보았다.

무명 두루마기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폼이 마치 어느 심심유곡에서 내려온 도사(道士) 같이 보였다.

"길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니오?"
늙수구레한 못 줄잡이가 김삿갓의 행색을 살펴보고 말대꾸 했다.

"길이야 밟고 지나 가라고 있는 것인데, 잘 들고 못 들고 할리가 있겠소이까 ?"
"허, 보아하니 염불이나 조아리는 땡중은 아닌것 같고 ,
그렇다고 선골도인(仙骨道人)도 아닌것 같고..."
말이 끝나자 김삿갓이 바삐 다음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문전걸식 , 비렁뱅이도 아닌 것 같다는 말씀이오?"

"허허, 그 양반 눈치도 빠르네. 여보시오 도사 비슷한 양반 ,

보아하니 출출하신 모양이니 새참국수에 막걸리나 자시오."

그러자 눈치껏 새참을 이고 온 아낙이 새로 ,국수 한사발을 말아 김삿갓 앞에 내밀었다.
농사철 들녁 인심은 좋은법이다. 너나없이 지나는 사람을 불러 차린상에 젓가락을 얹어주고,
누구라도 맛있는 들녁 음식을 지나치기 또한 어려운법이다.

김삿갓은 순식간에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막걸리도 꿀꺽꿀꺽 마셨다.
배가 불렀고 이제사 살것 같았다.
먹은 값을 한다고 모내기를 하는 논에 들어갈 처지가 아니라서

잘 먹고 간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어느덛 날이 저물었다. 어디에 가서 하루 밤 신세를 져야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꽤 큰 동네로 들어갔다. 이집 저집을 살펴보다가 사랑채가 있을 만한 어느 큰 집에 이르러,

"주인장 계시오"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뉘시오?"
안채에서 풍채가 그럴싸한 중년 남자가 탕건을 쓰고 나타났다.
"길을 가던 과객인데 어둠을 만나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합니다."

김삿갓은 처음으로 해보는 구걸 행각이라 차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과객이라고 ?"
순간, 주인장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과객이 날이 저물면 주막을 찾을 것이지 여염집을 왜 찾는단 말이오.썩 돌아가시오."
서릿발 같은 말씨로 매정하게 말을 한다.

세상 인심이 이럴수 있을까 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었지만 김삿갓은 꿀꺽 참았다.
(어차피 아쉬운 것은 나 인데, 화를 낸들 뭐 한단 말이냐.

앞으로 이와같은 일을 다반사로 겪게 될터인 즉 ..허허.. 그러나 오늘 인심은 한번 고약하군.)

이렇듯 생각한 김삿갓 , 그래도 밸이 틀려 한마디 하는데,
"허, 안된다면 그만이지 뭐 그깐일로 호령을 하오 ?"

"아니, 저 놈이 ! "
놈자가 서슴없이 튀어 나왔지만 이미 돌아선 그의 등 뒤에 꽂혔다.
김삿갓은 들은 척 만 척 그집 문전을 떠났다.
몇 집을 더 찾아가 가까스로 어느 허술한 사랑채에 들어가게 된 김삿갓은 저녁도 굶은 채
더벅머리 낮선 머슴놈과 더불어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 왠지 기가막힌 생각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 듯 한데 ,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가 자신의 처지처럼 애처롭게 들렸다.
김삿갓은 문득 시상이 떠올랐다.

사양구립양시비 / 斜陽邱立兩柴扉 삼피주인 수각휘 / 三被主人手却揮
두우역지풍속박 / 杜宇亦知風俗薄 격림제송불여귀 / 隔林啼送不如歸
날이 저물어 두어 집 문을 두두렸는데 주인은 번번히 손을 휘둘러 쫒는구나.

두견새도 이 박한 인심을 알고 있는지 수풀속에 떨어져 집에 돌아가라고 울어주누나.
어느사이 눈물이 김삿갓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방랑시인 김삿갓 (5) *김삿갓 눈 앞에 우뚝 솟은 금강산.
청운의 큰 뜻이 이루어져 청루거각에 누워 있어야 할 몸이 멍석이 깔려있는

낯선 사랑방에 누워 있다니 대체 어느 쪽이 잘못 되어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모두 뜬 구름이야 뜬구름"
"아니 이 양반이 잠꼬대는 웬 잠꼬대"
더벅머리 머슴놈이 부지중에 김삿갓이 내뱉은 말을 잠꼬대로 들었던지 툭툭 발길질을 한다.

"총각, 내 잠세."
김삿갓은 이렇게 말하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다음날도 , 또 다음날도 김삿갓은 계속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절은 벌써 오월 이었고 집을 떠난지 어언 한달이나 되었다.
봄도 지금은 다 지나가고 신록과 더불어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양구를 거쳐 금강산의 관문인 단발령에 도착하였으니 집에서 부터
오백리 길을 걸은 셈이다.

단발령 ..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쫒겨 , 이곳을 넘었을 어린 단종왕의 심사가 어떠 하였을까 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김삿갓의 마음을 무겁게 짖눌러 마루턱에 앉아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어 있다가 다시 발길을 재촉 하였다.

단발령을 지나면 천하의 명산 금강산의 품에 안긴다.

이곳에서 비로봉 까지의 거리는 백리길 이지만
수려한 내금강에 첫 머리가 밟히는 지점이었다.

금강산을 눈 앞에 두자 김삿갓의 가슴은 쿵쿵 뛰고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는 길 마다 길가에 나무며 ,막 자란 풀 한포기며,

딩굴고 있는 돌멩이 하나까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금강산 어귀 골짜기에는 드문드문 동네도 있었는데 명산을 배경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인심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무릉도원 같은 마을이 나타났다.

김삿갓은 쉬어갈겸 동네 어귀로 들어갔다.
마침 글방에서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집이 있어 김삿갓은 다짜고짜 들어갔다.
방안에는 여나믄 학동들이 있었는데 불쑥 나타난 김삿갓을 보자 호기심 찬 눈으로 바라 보았다.

"마침 글을 짓는 시간이군."
김삿갓은 학동들이 쳐다보던 말던 개의치 않고 학동들이 펼쳐놓은 종이를 바라 보았다.
글제는 역발산 (力拔山)으로 항우의 글을 지으라는 훈장의 분부였다.

김삿갓은 호기심에 한 학동이 지어 놓은 글을 주욱 읽었다.
"남산북산 신령왈 / 南山北山 神嶺曰 항우당년 난위산 / 項羽當年 難爲山"
"남산 북산 신령이 말하기를 항우가 살았을적 에는 산이 되기 어려웠다더라."
김삿갓은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린 학동이 지었다고 믿을수 없는 솜씨였다.

그래 옆에 아이는 어떻게 썼는가 하고 읽어 보았다.
"우발좌발 투공중 / 右拔左拔 投空中 평지왕왕 다신산 / 平地往往 多新山"
"오른손 왼손으로 빼내어 공중에 던지니 평지 곳곳에 새 산이 많이 생겼다."
김삿갓은 감탄했다. 어린 학동들의 글 짓는 솜씨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글 좀 하는 선비들은 힘 센 장사는 두려워 하지 않지만 글 잘 하는 인재는 두려워 하는 법이다.
김삿갓도 어린 학동들을 보기가 무서웠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나오기도 멋 쩍은 일 이라서 자기도 한수 적어놓았다.
" 항우사후 무장사 / 項羽死後 無壯士 수장발산 투공중 / 誰將拔山 投空中"
" 항우가 죽은 후 힘쓴 장사가 없었으니 지금은 누가 산을 뽑아 공중에 던질것 인가"

김삿갓 처음에 이곳에 들어 올때는 학동들에게 글 줄이나 가르쳐 주고 하루쯤 쉬어갈 요량 이었으나
어름어름할 자리가 아닌듯 하여 황망히 뛰쳐 나오고 말았다.

며칠을 더 걷자 금강산이 눈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때는 여름이 되었고 수풀사이에서 목탁을
두두리고 불경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절이 있었다.
김삿갓은 성큼성큼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를 밟았다.

법당안에는 까까머리 스님 한분과 유건에 도포를 입은 젊은 선비 하나가 대좌하고 김삿갓이
온 것도 모르고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헴 !"

김삿갓은 인기척을 하였다.
"누구요 ?"
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절 구경 좀 왔소이다."
김삿갓은 천연스럽게 대꾸하고 다짜고짜 법당 안으로 썩 들어섰다.
"아니 이양반이 여기가 어디라고 무례하게 함부로 올라오는게요 ?"
유건을 쓴 선비가 쌍심지를 치켜 세우며 날카롭게 내뱉는다.
"법당이지요, 자비로우신 부처님께서 어디 양반 상놈 가리신답니까 ?"

"아니 이 사람이
선비가 어이없어 하며 김삿갓을 위 아래 훝어보며 행색을 살펴본다.
차림새는 비록 남루하지만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글줄이나 읽은 사람으로 보였는지 ,
이 무례한 방문객을 보기 좋게 물리칠 계책을 재빨리 궁리했다.

"어디서 오셨소이까 ?"
이번에는 중이 말문을 열었다.
"예,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 올씨다. 잠시 쉬어갈겸 절 구경을 왔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곁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자 젊은 선비가 눈쌀을 찌푸리며 노골적인 언사로 말을 하였다.
"여보시오, 우린 지금 긴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자리를 삼가해 주시오."
"어허 , 보아하니 은밀한 말씀을 나누고 계신 모양인데 참 딱도 하시오."

"아니 뭐가 딱하단 말이오 ?"
김삿갓은 냉큼 일어날 기색은 없이 그들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6) *선비와의 언문풍월 대결.
"아니 뭐가 딱하단 말이오?"
중이 험악한 대꾸를 하는데 그의 말에는 칼과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스님, 긴요한 이야기라면 뒷켠 승방에서 나눌 일이지 어찌 부처님 앞에서 나눈단 말씀이오.

앉아 계셔도 구만리를 내다 보시는 부처님이 두렵지 않고 한낮 지나가는 이 과객은 두렵단 말이오 ?"
"뭣이 ?"
선비와 중은 동시에 입을 딱 벌리며 기막혀 했다.

말을 듣고보니 이치에 닿는 말이었다. 인간은 속일수 있을지언정, 부처님은 못 속이는 법,
지금까지 부처님 앞에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잘것 없는

나그네 하나를 물리치려던 자신들이 부끄러웠다.

선비는 이 낯선 과객의 말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마침내 한꾀를 생각했다.
그것은 어려운 글겨루기를 해서 창피를 주어 내쫒을 심산 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풍류 과객을 자처하며

어설픈 글줄이나 읊조리며 밥술이나 어 얻먹으려는 부류들을 많이 겪었지만

제대로 시 한수 읊는 놈은 본봐 없었다.

선비는 김삿갓도 그런 치들중 하나로 생각했다.

그래서 글짓기를 하여 뾰족한 코를 뭉개 버리고 었다.

그러나 우선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야 하겠기에 먼저 딴청을 피워 보았다.

"보아하니 풍월깨나 알고 있는것 같은데 진정 풍류를 아는 선비라면

내 톡톡히 선비 대접을 하려니와 에 자신이 없다면 어서 저쪽 주방으로 가서

찬 밥술이나 얻어먹고 가시구려."

김삿갓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오냐, 네 놈이 글줄이나 읽은 모양인데 어디 한번 혼똥을 싸보아라..)

이렇게 선비를 비웃으면서도 표면으로는 정색을 하면서 점쟎게 말문을 열었다.
"거 듣던중 반가운 말씀이외다. 불초 깊이 배운바 없으나 일찍이 부친덕에 천자문을 읽어

하늘천 따지는 머릿속에 집어 넣었고 어미덕에 언문줄이나 깨우쳤으니 하교 하시면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김삿갓의 이같은 말에 중이나 선비는 눈쌀을 더욱 찌푸렸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건 은근한 도전이 아니던가.
"쫗소.그럼 내가 먼저 운을 부를테니 즉시 답을하시오."

선비는 어차피 내친 발길이라 돌릴수 없어 이렇게 말을 하고 잠시 생각끝에 입을 열었다."

"타 ! "
그의 입에서 타란 말이 떨어졌다.
"타라니, 이건 한문 풍월이오,아니면 언문 풍월이오 ?"

김삿갓은 눈을 반짝이며 선비에게 물었다.
"그야 물론 언문 풍월이지."

김삿갓을 싹 무시하는 말씨였다.
"좋소이다. 그럼 내 답 하리다. 사면 기둥 붉게 타 ! "

"또 타 !"
"네 절 인심 고약타 !"
타자가 떨어지기 무섭게 김삿갓이 내뱉으니 선비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더구나 갈수록 듣기 거북한 말이 나오자 다시 더부를 마음이 없었다.
잘못 더 불렀다가는 무슨 욕이 나올지 모를 판이었다.

김삿갓은 선비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타!" 하고 내뱉으면 "지옥가기 꼭 좋타 !" 하고 내쏠 작정 이었다.

그러나 선비의 입에서는 더이상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냥 있기가 안 됬던지 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7) *승수단단 한마랑 / 僧首 團團 汗馬閬

"그깟 언문 풍월이야 어디 풍월 축에나 들수 있겠소 ? 이번에는 진짜 풍월을 해봅시다.
당신이 냉큼 지어내지 못하면 썩 여길 물러나시오."
중의 이같은 말을 들은 김삿갓은 신명이났다.

"허..그럼 지금까지는 가짜 풍월 이었구려. 좋소이다. 진짜 풍월이 어떤것 인지 맛좀 보여주시오
내 맛보고 떫으면 이자리에서 썩 나가리다."
"허, 이 사람 말도 많구먼."
중이 심히 못마땅 한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건방진 녀석의 코를 낙짝하게 해줄까 궁리를 하다가 스스로 묘한
계책을 생각 하였노라 내심 감탄을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한문과 언문을 공부했다 하니 내 운을 부르겠소."

김삿갓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역시 대사다운 말씀 이십니다. 대사는 항시 공평해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쟎습니까 ?"
"허허 , 당신은 말방아가 너무 심하오."
선비가 한 마디 내쏘았다. 중이 입을 열어 운을 불렀다.
"운은 언문의 "기억"자 "니은"자이고 글제는 산수(山水)로 하시오."
"듣고보니 공평지기는 하나 꽤 까다롭습니다.

하여튼 기왕에 떨어진 운이니 불러 볼 수 밖에 더 있겠소이까 ?"

김삿갓은 끝까지 중의 말을 물어 뜯으며 지체없이 붓을 들어 종이에 일필휘지

(一筆揮之)로 글을 지어 놓았다.

"수작은 저춘색벽 / 水作銀 杵春絶壁 이오 , 운위옥척 도청산 / 雲爲玉尺 度靑山 " 이라 ..
폭포수는 은 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 구름은 옥으로 만든 자가 되어 청산을 가늠토다.
" 자 어떻소까? 시제(時題)의 기억과 니은은 각각 끝자에 붙였소이다."

"......."

중과 선비는 내심 깜짝 놀라 김삿갓을 바라보며 마른 침만 삼켰다.
아무리 헐띁을래야 흠을 잡을수 없는 명구였다.

삿갓이 차림새와 딴판인것을 알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김삿갓을 예로써 정중히 맞을수도 없고

내칠수도 없어 쩔쩔 매게 되었다.

김삿갓은 그들의 심보를 환히 꿰뚫고 있었다.
설사 이들이 더불어 풍월을 더하자고 수작을 걸어 오더라도 상대하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침이라도 퇘퇘 뱉어주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는 일이라서 글로라도 그들을 희롱하고 싶었다.

"묵묵 부답인것을 보니 불초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보구려.

내 한수 더 읇어드리리다."

김삿갓은 이어 글귀를 한자 더 써서 두 사람앞에 내밀었다.

"승수 단단 한마랑 / 僧首 團團 汗馬閬 이요, 유두 첨첨 좌구신 / 儒頭 尖尖 坐狗腎" 이라 ..
"성령 동령 동정 / 聲令 銅鈴 銅鼎 하고 , 목약 흑초 락백죽 / 目若 黑椒 落白粥" 이로다.
둥글둥굴 중대가리는 땀찬 말부랄이요. 뾰족뾰족한 선비의 머리통 상투는 앉은 개 좃이로다.
목소리는 구리방울을 구리솥에 굴리는듯 요란스럽고

눈깔은 검은 후추알이 흰죽에 떨어진듯 하도다.
정말 지독한 욕설이었다.

처음에는 무슨뜻이지 잘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 중과 선비는 뒤늦게
자기들을 욕하는 글임을 알아차렸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이런 죽일놈을 보았나 !"
선비가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김삿갓은 벌써 섬돌아래 서 있었다.
"여보, 선비님 눈을 부릅뜨니 정말 흰죽에 후추알 떨어진것 같소이다. 허허허허 ...."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날리며 그 절을 나와 버렸다.

다시 산길을 걷는 그의 가슴은 냉수를 마신것 같이 시원하였다.
중과 선비가 화가 치밀어 펄펄 뛰는 양이 눈에 선했다.

방랑시인 김삿갓 (8) *오애청산 도수래 ....나는 본래 청산유수를 사랑 한다오.

금강산 까지 팔십리 남았다는 말을 들은 김삿갓은 모호했다.
비로봉까지 팔십리란 말인지 내금강 입구까지 팔십리 남았다는 말인지 도통 짐작 할수 없었다.
그러나 어떠랴, 어차피 세상을 떠도는 몸이거늘,

팔십리든 팔백리든 남은 거리가 문제되진 않았다.
김삿갓은 한가로운 여름구름 같이 유유자적한 터라 하루 삼십여리만 걸어도 하루해가 지나갔다.

날이 다시 저물기 시작했다.
산골의 저녁은 빠른 법이다.

이렇게 날이 저물때면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잠자리였다.
"허 , 날아 다니는 새도 밤이되면 찾아갈 둥지가 있건만 ..
나는 또 뉘집 문 앞을 기웃거려야 한단 말인가 ?"
김삿갓은 탄식이 절로 났다.

두어 고개를 넘으니 조그만 동네가 보였다. 십여호쯤 되어 보이는 빈촌이었으나
김삿갓은 내심 반가웠다.
더 걸을 수도 있겠지만 도중에 인가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 심심산중에서 큰낭패를 당하게 생겼다.
그는 다짜고짜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발길이 멋는대로 김삿갓은 어느 집 문간에서 주인을 찾았다.

"주인장 계시오 ?"
잠시후 뒤곁에서 허름한 차림의 집주인 인듯한 남자가 나타났다.
"뉘십니까 ?"
"지나가는 길손이외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까하고 염치없이 들렀소이다."
"묵으실수는 있겠으나 워낙 누추하여 모시기가 부끄럽습니다."
남자는 무척 친절하게 대답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불청객이 어찌 좋고 나쁨을 가리겠습니까.
재워주시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그저 밤이슬만 이라도 피하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들어 오십시오."
김삿갓은 사나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억새풀로 엮은 자리가 깔려 있었다.

"저녁은 아직 안드셨지요 ?"
"예, 허나 너무 염려 마십시오."
거드름을 피는 무리들에게는 심술을 부리는 김삿갓이지만

이처럼 순박한 사람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겸손한 그였다.

설혹 저녁을 못 얻어 먹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여보 !"
사나이는 부엌을 향해 마누라를 불렀다.
"왜 그러셔요 ?"
부엌에서 아낙의 대답이 들렸다.
"손님이 오셨으니 한사발 더 들여오구려."
"아니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김삿갓이 보건데 , 이집 살림도 넉넉치 않아 보이는데 저녁까지 신세를 지게되니,
고맙고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잠시후 곱게 생긴 아낙이 저녁상을 들여왔다.
"손님, 비록 ​험한 음식이지만 같이 드십시다."
사나이는 상을 김삿갓 앞으로 밀어 놓으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김삿갓이 그리 말을 하고 상을 내려다보니 소나무로 만든 개다리소반의 상에는 백기 사발 두개에
죽​이 담겨져 있었고 ,김치 한 보시기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초라한 상차림 이었다.
"저 때문에 혹시 안주인께서 끼니를 거르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김삿갓은 다소곳이 저녁상을 들여놓던 아낙이 생각되었다.
"아 그야 모자라면 또 쑤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걱정마시고 어서 드십시요."​
​김삿갓은 수저를 들었다. 죽은 미음처럼 묽었다.
"그래 어떻게 사십니까?"

김삿갓은 이런 죽으로 끼니를 삼으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염려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런 산골에 사는 놈이 별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나뭇짐이나 해서 내다 팔아서
이렇게 풀칠이나 하며 살고 있지요."
주인사내의 말을 들은 김삿갓은 코끝이 찡해옴을 느꼈다.
​(세상에는 하챦은 글줄이나 배워 그것을 팔아 거들먹거리며 사는 놈들도 많구먼 ...)

김삿갓은 막연한 분노를 느꼈다.
"실례가 됩니다만 내외간의 금술은 어떻습니까 ?"​
김삿갓은 대체 이들 부부가 이렇듯 곤궁한 가운데서 무슨재미로 살고 있을지 궁금하여 ​물었다.
"금슬이요 ? 헤헤헤 ..그야 이를 말씀입니까 ?"
사나이는 갑자기 신명이 나는듯 하였다.
"그럼 됐습니다. 많은 재물로 호의호식 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외간 금슬이 좋지않아

인생을 불행하게 보내는 사람도 많은데 주인장께서는 비록 가진것은 적을지 몰라도

내외간 금슬이 좋으시다 하니
남들이 부러워할 행복을 가지신 분 입니다."

​김삿갓은 이렇게 주인 사나이를 위로하고 그날밤을 초라한 그곳에서 보내고
다음날 떠나며 시 한수를 남겨 놓았다.​

사각송반 죽일기 ​ / 四脚松盤 粥一器
천광운영 공배회 / 天光雲影 共徘徊

주인막도 무안색 / 主​人莫道 無顔色
오애청산 도수래 / 吾愛靑山到水來

네다리 송반에는 죽 한그릇 뿐인데 하늘과 구름이 같이 서려있구나
주인은 무안해서 어쩔줄 몰라 하는데 염려 마시오 나는 본래 청산유수를 사랑 하니까!

방랑시인 김삿갓 (9)
*와청서원에 우성유라 ..한가로이 누워 있자니 서원의 빗소리가 그윽하도다.

금강산은 독특한 풍경을 자랑하는 산이다.
봄은 마치 앙증맞은 일,이십대 아가씨 처럼 수줍은 아름다움으로 치장하여
금강산(金剛山)으로 불리고,

여름은 한여름 억세게 자라나는 명아주 처럼 생활력이 왕성한 삼,

삼십대 여성으로 보아 봉래산(逢萊山) 이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 불리는 이름은 풍악산 (楓嶽山) 이라 하는데 이것은 인생의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오,육십대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인생의 행로를 비유한 것이리라.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이라 하는데 이것은 산의 모습도 늙은 노파의 처지처럼
그좋던 풍경이 어느덧 사라지고 산골짜기 봉우리마다 바위만 앙상하게 보여서 붙인 이름이다.

발길을 더해 갈수록 금강산의 수려한 본색이 드러났다.
김삿갓은 완전히 주의의 경치에 취해 있었다.
자연히 우암 선생의 시가 저절로 읊어졌다.

산여운구백 하고 / 운산불능변 이로다 ( 山與雲俱白 / 雲山不能辨 )
운귀산독립 하니 / 일만이천봉 이로다. ( 雲歸山獨立 / 一萬二千峯)
산도 희고 구름도 희니 산과 구름을 구별할 수 없도다
구름은 흘러가고 산만 홀로 남으니 우뚝솟은 봉우리가 일만 이천이로다.
김삿갓은 술에 취한 듯 곤드레 발길로 산길을 올라갔다.

고개를 넘으니 이름모를 수려한 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데 정면으로
절 지붕이 보이고 그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원하게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도 좋거니와 녹음이 우거진 시냇가에는 뜻밖에도
오륙인으로 보이는 선비들이 모여앉아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순간 김삿갓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쪽을 주시 했다.

"올커니, 천렵을 하는가 보구나. 좋지.시내에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하려나 ? .. 게다가
맑은 소주를 곁들이면 더욱 좋을터, 이야말로 무릉도원에서 신선놀음 아니냐 , 어디 한번 가보자."
무슨 볼일 이라도 있는듯 쏜살같은 걸음으로 김삿갓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과연 김삿갓의 추측대로 선비들이 천렵놀이를 하고 있었다.

냇가에는 솥이 하나 걸려 있는데 닭을 삶는 구수한 냄새가 회를 동하게 한다.
김삿갓은 잘 하면 닭국에 술잔 이라도 얻어 먹을수 있겠다 싶어 신명이 저절로 났다.
선비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김삿갓은 빨리 걷던 걸음을 점잔을 빼는 양반네 걸음으로 바꿨다.
선비들은 모두 여섯 사람이었는데 모두 나이가 이십을 갓 넘어 보였고 옷 차림과 생긴 모습에선
귀티가 감돌고 있었다.

"허 , 한양 양반네 자제들이 금강산 구경을 와서 천렵을 하는 모양이군... "
김삿갓이 속으로 이같이 새우며 다가갔지만 그들은 저마다 주위 경계에 도취한 듯 아무도
김삿갓의 접근을 모르고 있었다.

"허험 ! "
김삿갓은 우선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그들에게 알렸다.
돌연한 불청객의 침입을 그들은 비로서 알아차리고 일제히 김삿갓 쪽으로 눈총을 쏟았다.
"참 운치가 있습니다. 어디 명장의 그림이 따로 있습니까 ,이곳이야 말로 그림속의 풍경 입니다 그려.."
김삿갓은 우선 넉살부터 늘어 놓았다.

젊은 선비들은 불쑥 나타난 이 불청객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한 사나이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어디를 가는 길이오 ?"
길을 잘못 든것 아니냐는 물음이었고 ,
차린 행색으로 보아서 당신이 참례 할 곳이 아니다는 말이기도 하였다.

어찌 김삿갓이 이 말뜻을 모르랴.
"발길 닿는대로 가는 나그네가 별달리 갈 곳이 있겠습니까 ?
젊은 선비들이 이렇듯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시회(詩會)라도 하시는 것 같아
어깨너머로 배울 바라도 있을까 하여 왔소이다."
"뭐 시회라고 ?"
선비들은 자기들끼리 얼굴을 쳐다 보았다.

주제꼴을 볼량이면 영락없는 걸인인데 시회를 운운하다니..

별꼴을 다 본다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눈꼬리가 위로 치켜진 것으로 보아 성깔깨나 있을성 싶은 사나이가 말참견을 하였다.
"당신이 시회를 다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글을 좀 읽은 모양이구료. 어디한번 읊어보겠소 ?"
"예, 운자를 주시면 미약하지만 생각해 보지요."
김삿갓은 커다란 돌멩이를 자리삼아 깔고 앉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선비들은 다시 저희들끼리 얼굴을 마주보며 눈을 찔끔거렸다.
이것 봐라 하는듯이.

"좋소, 그럼 내 운을 떼겠소.
봄춘(春) 자 ! "
"예, 고맙습니다. 지필 좀 빌려주셨으면 합니다만 ...."

"예 있소 ! "
선비 하나가 내미는 종이와 붓을 받아들고

김삿갓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달필로 내리 휘갈긴다.

강호낭인 우봉춘 / 약반시붕 회사루 ( 江浩浪人 又逢春 / 約伴詩朋 會寺樓 )
소동인래 류수암 / 고감승거 백운부 ( 小同人來 流水暗 / 古龕僧去 白雲浮 )
박유소답 삼생원 / 호음능소 만종수 ( 薄遊少答 三牲願 / 豪飮能消 萬種愁 )
의파청회 청시엽 / 와청서원 우성유 ( 擬把淸懷 靑柿葉 / 臥聽西園 雨聲幽 )
강호낭인이 다시 돌아온 봄날을 만나 시쓰며 절에서 시회를 같이한다.

골짜기에 한 사람만 나타나도 물가에는 그림자 어리고

절 찾아가는 스님 머리에는 흰구름이 떠있구나

어쩌다 금강산에 오니 삼생원이 풀린 듯 하고

마음껏 술을 마신다면 온갖 수심도 사라지리라

내 이 간절한 회포를 감나무 잎에 적어놓고 한가로이 누워 있으니

서원의 빗소리가 그윽하고나.


방랑시인 김삿갓 (10)
*일년춘색 복중전 ..(일년내내 춘색이 깊이 전해지도다)

김삿갓의 시를 본 선비들의 얼굴은 일순간 크게 달라졌다.
애초 김삿갓이 예측한 대로 이들은 한양의 권문세도가의 아들들이었다.

추위가 가신 늦은 봄에 돈냥이나 가지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왔는데 아직도 비로봉 근처에는
가보지를 못하고 건너편 절에 숙소를 정해놓고 날마다 천렵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부모 덕택으로 학식깨나 있다는 선비를 불러 독서당을 차려놓고 글 공부를 하는 터인지라
이들은 자신들이 글 실력이 남다름이 있다고 뽐내던 처지였고 천만 뜻 밖에도 김삿갓의
글이 진솔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허허 , 노형 이제보니 보통 솜씨가 아니시구료."
당신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어느새 노형으로 고쳐져 나왔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들은 풍월이지요."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겸손을 보였다.

"자, 이리 앉으시오.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한번 어울려 봅시다."
김삿갓은 사양하지 않고 그들이 깔고 앉아 있는 화문석 돗자리로 냉큼 자리를 옮겼다.

"그래 선비들께서는 어디서 유람을 오셨습니까 ?

불초가 생각하기로는 멀리 한양에서 오신 듯 한데.."

"아니 , 우리가 한양에서 온 줄 어찌 알고 계셨소 ?"
선비들은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사람이 가진 것은 없어도 두 눈 만은 밝습니다.
멀리서 보자하니 육조 대관들이 노니시는 듯 하여 내려왔지요."
이왕 내친 김이라 에라 모르겠다 하며 김삿갓은 그들이 좋아 할 말을 던졌다.
"육조 대관들 이라고요 ?"
그들은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면서 김삿갓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습니다. 불초가 보기로는 장차 육조에서 노니실 분들 이었습니다.
이미 엄친들께서 탄탄한 길을 닦아놓고 계시지 않습니까 ?"
"아니 ......"
그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이 허술한 나그네 불청객이 고명한 도인이나 기인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자기들의 처지를 쪽집게로 뽑아내듯 쏙쏙 뽑아내니 말이다.

사실 이들의 부친들은 조정에서 정삼품 이상의 벼슬자리에 있었다.
때문에 집안의 배경만으로도 벼슬 한자리는 얻어 할수 잇는 처지였다.

"허허 , 불초가 괜한 말을 했나봅니다. 너그러이 들어 주십시오."
그들의 심중을 뒤흔들어 놓은 김삿갓은 마무리 격으로 슬쩍 눙쳐버렸다.

"귀인께서는 대체 뉘십니까 ?"
마침내 그들의 말씨는 최상급으로 비약되었다.

"보시다싶히 이렇게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입니다.
강호 유랑인이 무슨 근본이 있겠습니까 ?"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김삿갓의 말은 그들에게는 신비스럽게만 들렸다.
마침내 푸짐한 술상이 벌어졌다. 닭국에 건포와 육포등 귀한 안주가 나왔고 술은 매실주였다.
"이제 시 한수만 더 들려 주시면 큰 공부가 되겠습니다."
선비들은 술이 몇순배 돌아가자 김삿갓에게 시 한수를 청했다.

"좋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수 지어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모처럼 좋은 안주에 향기로운 술까지 마시게 되었는데다 취향이 도도했다.

그는 몇번 눈을 깜빡이다 술술 시를 적어 내려갔다.
정관장석 에 소계변 하고 / 백분청유 에 도두견 이라
鼎冠장石 小溪邊 / 白紛靑油 도杜鵑
쌍저협래 하니 향만구 하고 / 일년춘색 이 복중전 일세.

雙箸狹來 香滿口 / 一年春色 腹中傳
시냇가 돌사이에 솥을 걸어놓고 백분과 청유로 두견화 적을빚네
저를 들어 두어번 입에 넣으니 그윽한 향기가 입안가득 퍼지고
춘색은 일년내내 깊이 전해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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