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74) *인풍루에서 만난 여인.

우현 띵호와 2021. 9. 30. 23:10

방랑시인 김삿갓 (174) *인풍루에서 만난 여인.

김삿갓은 인풍루 누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에 취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보니,

인풍루 처마에는 석양빛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어허 ! 시각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

주위를 둘러보니, 오늘따라 날씨가 따듯한 탓인지

인풍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는데, 개중에는 아낙네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강계는 색향의 고을인지라,

오르락 내리락하는 아낙네들은 한결같이 미인이었다.
(강계에는 미인 아닌 여인이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림이 없구나.)

김삿갓은 미인이 아닌 여인을 찾아 보려고 하였지만,

짚더미에서 바늘을 찾기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

미인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어떤 시인은 미인을 두고,

素顔發紅花 (소안발홍화)
화장도 안 한 얼굴에서 붉은 꽃이 피어나고

美目流淸揚 (미목류청양)
고운 눈 언저리에선 맑은 샘물이 솟는다.

라고 읊은 일도 있었다.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관심과 기쁨을

나눠 주는 하나의 미덕이기도 한 것이다.

김삿갓, 문득 깨닫고 보니, 저쪽 난간에서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뒤로 돌아서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옷매무새와 뒷태만 보아도 어딘지 모르게 향기가 풍겨나는 듯한 미인이었다.

여인은 계집아이를 데리고 왔는지,

그녀 옆에는 열두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함께 서 있었다.
(저 여인은 어떤 여인이길래, 조그만 계집아이까지 데리고

인풍루에 나들이를 나왔을까 ?)

김삿갓은 주변을 둘러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여인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여인은 김삿갓이 자기에게 눈길을 주는 줄도 모르고,

흘러가는 강물을 오랫동안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옆에 서 있는 계집아이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산월아 ! 너는 얼마 전에 라는 시조를 거문고로 배운 일이 있었지 ? "
"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그 시조가 머리에 떠오르는구나. 너는 그 시조를 외울 수
있거든 지금 한번 외어 보아라."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할 제 쉬어 간들 어떠리 ! "

산월이라고 불린 계집아이가 시조 한 수를 단숨에 읊조리자,

여인은 계집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너는 그 시조를 누가 지었는지 알고 있느냐 ? "
"그 시조는 명종(明宗) 때의 명기 황진이(黃眞伊)가 지은 시조가 아니옵니까."
여인은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며,

"너는 머리가 영리해 모르는 것이 없구나.

황진이는 만고의 명기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좋은 시를 많이 남겨 놓았느니라. 그 시조에 나오는 는 와 푸른 물을 의미하는
를 합 해 부른 말이고, 이라는 말은 하늘에 떠 있는 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아명이 임을 함께 빗댄, 이중법(二重法)으로 쓴 말이니라."
"어마 , 그래요 ? 나는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었네요."

"그 시조의 멋은 바로 그런점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라는 책을 보면,
누군가가 그 시조를 한시(漢詩)로 옮겨 놓은 것이 있는데,

이왕이면 그것까지 배워 두면 좋을 것이다." 하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그 여인과 소녀가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내심 크게 놀랐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한시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유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시조를 한문으로 어떻게 옮겨 놓았습니까,

이왕이면 그 한시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 한시도 배워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읊어 줄 테니 잘 외워 두어라."

그리고 여인은 한문으로 번역된 라는 시조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읊어 주는 것이었다.

靑山影裡碧溪水 (청산영리벽계수)
容易東流爾莫誇 (용역동류이막과)
一致滄海難再見 (일치창해난재견)
且留 明月暎娑娑 (차유명월영사사)
김삿갓은 경치를 구경하는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여인의 해박한 지식에 너무도 놀라워 자기도 모르게,
"엇 ! ---"
하고 감탄하며, 여인의 앞쪽으로 한 발 성큼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