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거지 처녀와의 하룻밤

우현 띵호와 2022. 6. 13. 23:15

거지 처녀와의 하룻밤

경주에 사는 김 씨 총각은 집이 꽤 부유했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장성하여 무과에 급제했으나 

마땅한 벼슬을 얻지 못해 김선달이라 불렸는데 

뇌물을 바쳐서라도 벼슬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께 천냥을 받아 한양으로 올라왔으나 

막상 지체 높은 관리를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김선달은 객점에 머물 곳을 정한 후 대갓집 청지기들과 

매일같이 어울리며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년도 되지 않아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탕진하였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천냥만 있으면 이번엔 고을 원이나 

병사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논과 밭을 팔아 

다시 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나 계속하다 보니 집과 땅을 다 팔고도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어머니가 이웃집 행랑에 새 들어 산다는

 기별을 보내왔습니다.
김선달은 그 소식을 듣고 탄식하였습니다.
 
네 이게 무슨 꼴이람 한양에 와서 고관들 낯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돈만 탕진하고 말았구나.
속상한 마음의 행장을 정리하다 보니 그에겐 

7, 80냥 가량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돈이면 집에 내려가 2, 3개월은 어머니를 공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힘없이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다 날이 저물어 주막집을 찾았는데 주막집 문 옆에 

헐벗고 굶주린 어린 처녀가 몸을 웅크린 채 앉아 떨고 있었습니다.
김선달은 혼자 저녁 밥을 먹으려다가 추운 날씨에 떨고 있던

 거지 처녀를 외면할 수 없어 잠깐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처녀는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는데 가까이 보니

 17~18세쯤 되어 보였습니다.
김선달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저녁을 먹이고 

자기는 아랫목에 처녀는 윗목에서 자라고 하며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거지 처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김선달은 처녀를 고향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자 그녀에게 스무 냥을 주며 말하였습니다.
 
속담에 옷 입은 거지는 얻어 먹어도 벌거벗은 거지는 

못 얻어 먹는다 했소.
이 돈으로 허름한 적삼과 치마라도 사 입으시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처녀의 사정이 딱하니 일을 거들며 

주막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훗날 데리러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거지 처녀는 그가 경주에 사는 김선달이라는 것만 기억한 채

주막에서 일을 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어떤 장사꾼이 담배 한 짐을 지고 주막에 들렀는데 

처녀는 김선달이 준 돈으로 그 담배 한 짐을 모두 사두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담배 농사가 흉작이라 몇 개월 뒤 처녀는 가지고 있던

담배를 10배의 가격으로 되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처녀는 주막에 빈방 하나를 새내어 다른 물건들을 사들여 

사고 팔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해 겨울이 되었을 때 처녀는 몇 배의 이득을 보게 되었고

그 이듬해는 수입이 점점 늘어나 점포도 새로 얻게 되었습니다.
 
처녀는 집신과 종이 명주나 비단 같은 손쉽게 사고 팔 수 있는

물건들을 취급하면서 떡과 탁주까지 곁들여 팔았습니다.
해가 갈수록 매년 풍년이 들어 살기가 좋아지자 

인근 객점이나 처녀의 점포도 덩달아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거지 처녀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몇만 냥에 이르는 돈을 모아 번듯한 기와집에서 

살게 되었고 김선달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어느덧 

소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처녀는 선생을 모셔 아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고 

자신은 쉬지 않고 계속 장사를 하였습니다.
처녀의 재산이 많아지자 어떻게든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려는 

남자들이 들끓었지만 처녀는 항상 김선달을 기다리며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주 아전이 곡물을 헌납하기 위해

한양에 올라왔는데 물량이 모자라 급히 200냥이 필요하였습니다.
다시 경주까지 갔다 올 수도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객점 주인이 거지 처녀에게 가면 돈을 

융통할 수 있을 거라며 집을 알려주었습니다.
 
아전이 처녀를 찾아오자 그가 경주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두 말 없이 돈을 빌려주며 김선달에 대해 물었습니다.
경주에 사는 서너 명의 김선달 중에 생김새와 상황이 

처녀가 찾는 김선달과 꼭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선달은 가세가 기울어 나무를 내다 팔아 생활하며 

혼기마저 놓쳐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처녀는 아전에게 자기가 빌려준 돈은 

경주에 가서 김선달에게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며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내용의 언문 편지를 써서 

아전을 통해 보냈습니다.
 
김선달이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처녀는 

예전에 거짓 처녀가 아니었습니다.
처녀는 김선달에게 아들을 인사시키고 

그렇게 셋이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한양에 올라온 김선달은 마땅히 할 일도 없었는데 

부인은 그에게 열량을 주며 술을 마시던 누구에게 

주던 그 돈을 다 쓰고 들어오라며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한양 땅에 아는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어

김선달은 돈을 쓰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부인은 다시 열량을 주었지만 

김선달은 또 돈을 쓰지 못했습니다.
며칠 동안 같은 일이 반복되니 부인은 다시 열량을 주며 말했습니다.
 
오늘도 돈을 쓰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실 거면 

다시 경주로 내려가십시오 

김선달은 그동안 자신이 고생하던 걸 생각하니 

아까워서 쉽게 돈을 쓰지 못했는데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김선달이 큰 길을 지나는데 골목 기와집 앞에 

12세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집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큰 집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마당에는 풀이 한 가득 자라 있었습니다.
 
김선달은 이상히 여겨 왜 우는지 물어보자 아이는 

배가 너무 고파서 울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선달은 아이가 안쓰러워 팥죽 한 그릇을 사다 주었는데 

아이는 팥죽을 먹지 않고 안으로 들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김선달이 아이를 잡아 이유를 묻자 

대감마님도 굶어 죽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놀란 김선달은 아이를 시켜 쌀을 사오게 한 뒤 

미음을 끓여 먹이고 급히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한숨 돌린 김선달은 주변에 그 집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집 대감은 병조판서였는데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갔다 돌아오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병까지 얻어 일부러 곡기를 끊은 채

죽으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선달은 그날 돈 열량을 모두 쓰고 집에 돌아왔는데

 부인은 어디에 돈을 썼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부인은 매일같이 열량씩 주었고 김선달은 날마다 

대감집에 들러 그를 돌봤는데 두어달이 지나니 

대감은 기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대감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 밖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김선달이 놀라 급히 들어가 보니 대감이 의관 정제하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감은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 다시 병조판서에 제수되었고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김선달이 심성이 어질고 

이미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니 그에게도 벼슬을 하나 

내려주었습니다.
훗날 김선달은 병마절도사 자리까지 올랐고 거지

 처녀였던 부인과 함께 평생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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