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대구 동내이름 유래

우현 띵호와 2023. 4. 26. 22:53

대구 동내이름의 유래

- 남산동(南山洞)
대구부 서상면(西上面)에 속해 있었는데 

그 위치가 남산 아래라 하여 남산(南山)이라 하였다.
1914년 남산정(南山町)이 되었고 1946년에 남산동이 되었다.

- 대명동(大明洞)
대명동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과 관계가 깊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2차례나 명나라에서 왔다.
수군을 지휘하던 이 충무공과도 각별하게 지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를 한다.
귀화를 한 두사충을 조선 조정에서 땅을 하사하여

(대구시내 경상감영 일대) 살게 해준다.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 대덕산:앞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하고 단을 쌓아올려 

매월 초하루가 되면 천자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 반월당(半月堂)
이곳에 건평 61평의 2층 목조건물을 지어서 

백화점 영업을 하였는데 그 백화점 이름을 

반월당이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

처음 백화점 반월당을 세운 이는 약전골목에서 

많은 돈을 모은 차병곤씨 였는데 취급품목은 

수예품이 주류를 이루어 여학생이 주 고객이었다고 한다.

반월당의 경영은 차씨의 부인이 주로 하였는데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고 1943년 경영난으로

딴 사람에게 넘겨져 공신백화점으로 바뀌게 된다.

해방 이후 공신백화점도 문을 닫고 

구 시대의 흔적을 안은 채 헐리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업종들이 바뀌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덕산동(德山洞)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 

반월당(半月堂)이라고 전해오고 있던 것이다.

- 대봉동(大鳳洞)
1918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달성군 수성면의 

봉덕동과 대명동의 일부가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두 동의 일부를 합쳐 대명과 봉덕의 머리글자를 따서 

대봉정(町)으로 불리다가 대봉동이 되었다.

- 대신동(大新洞)
대신동은 서문시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량들이 즐겨 찾았던 천황당(天皇堂) 못을 메우고, 

1920년 그 자리에 큰 장을 옮기게 된다.

못자리로 시장을 옮긴 후 

서문시장(西門市場)으로 부르게 되었다.
서문시장은 큰 장으로 평양, 강경 장과 함께 

전국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못이 있었던 주변에 새로운 동네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큰 장에서 큰 대(大)를 따고,새로 생긴 동네라 해서 

신(新)을 따서 대신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4년에 신정(新町)으로 부르다가 

1946년에 다시 대신동이 되었다.

- 동성로(東城路)
일제강점기때인 1906년10월부터 1907년4월까지 

대구읍성의 동편을 헐어  도로로 사용한데서 

유래하여 동성로라 하였다.

대구부 동상면 지역으로 1914년에 

동성정(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에 동성로가 되었다.

- 봉산동(鳳山洞)
봉산이란 제일중학(구, 제일여중)이 자리하고 있는 

자라바위가 있는 산을 말하는데 

이 이름을 따서 봉산동이라 지었다.

조선 숙종 때부터 이 산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를 발사하였다.일명 오포산이라고도 한다.
봉산의 다른 이름은 연구산(連龜山), 운구산(運龜山),

자래방우산(자라바위산) 이라 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제일중학 정원에는 돌거북이 있는데 

머리는 남쪽인 앞산을 꼬리는 북쪽인
시내를 향하고 있다.
이는 비슬산에서 시작된 지맥이 약해지는 것을

보(補)하는 동시에 화기를 누르는 비보책인 것이다.

- 삼덕동(三德洞)
일제시대에는 삼립정(三笠町)으로 불리다가 

천덕(天德), 인덕(人德), 지덕(地德)을
합하여 삼덕동이 되었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지역 통폐합에 따라 남성리, 신동의 일부를
합하여 삼립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에 

덕산동의 일부를 합하여 삼덕동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포정동(布政洞)
이곳에 있던 경상감영의 선화당(宣化堂) 정문이 

포정문(布政門)이었기 때문에 포정동이라 하였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정(上町)으로 불리다가 1946년 동명 변경에 따라 

포정동으로 바뀌었다.

♣ 감사가 있는 곳, 즉 감영(監營)을 

포정사(布政司)라고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자갈마당
이곳은 지금부터 대략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버려진 황무지였다.
그러나 6.25 이후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어

대구 북쪽의 관문구실을 하게 되고 교통의 

중심지가 되니 자연 이 일대가 넓은 장터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넓은마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땔감과 구들장을 팔러나온 사람들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만 오면 땅이 질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 

자갈을 많이 깔아놓게 되었다.
그후 사람들은 넓은마당 대신에 <자갈마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구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또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봉덕동(鳳德洞)
대구부 상수서면(上守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산동(鳳山洞)과 

덕산동(德山洞)을 병합하여 봉덕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1918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었으며 일부를 떼어내어 대봉동에 넘겨주었다.

1929년 경에는 대구중학 근처에 대구지역 최초의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고 하며 그후 인근의 경산, 

하양 등지로 재배면적을 넓혀갔다고 한다.

- 신천동(新川洞), 신암동(新岩洞)
1778년(정조 3년) 대구 부사 이서가 대구부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에 제방을 쌓아 현재의 신천이 

흐르는 위치로 물줄기를 돌려 새로이 하천을 만들었다.

그 하천을 새로 만든 하천이라 하여 신천(新川)이라 하였고, 

그 가장자리에 있던 마을을 신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천동 아래에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골이 깊은 계곡이라해서
대곡리(大谷里)로 불리어지며 한골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 마을로 신천이 흐르게 되면서 

바위가 많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신암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 수성동
 수성동은 옛날 하동(현재 수성1가동)과 

배일촌(동구 신천동)사이의 들판으로서 

전부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약 40여년 전부터 한집 두집 불어나기 시작하였으며 

1948년 대구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동구 신천동에 속하였다가 1980년 4월 1일 동구에서 

수성구로 분구될 때 시조례 제1213호(1979. 8. 28 공포)에 의해 

당시 동구 신천3,4동의 일부가 수성구로 편입되면서 

수성 1,2,3가에 이어 수성4가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성들판 한가운데 위치했으므로 

그 당시 수성동은 자연부락이 존재하지 않았다.
 
- 만촌동(晩村洞)
본래의 이름은 '늦이'라 하였다.

'늦이'의 '늦'은 늦다라는 뜻이며

'이'는 원래  인칭대명사이나 고어의 

'리(里)'의 음차로 보아야 한다. 

이 곳 주민들은 '늦이'를 한자로 지잉(遲芿)

(遲=訓借, 芿=音借)으로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만촌(晩村)의 촌(村)은 '리(里)'와 

같은 '마을'이란 뜻이다.

이와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예로부터 

이곳은 달성하씨, 달성서씨 등이 문호를 차려놓고 

강학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하는 반면 선비의 

기질에 따라 생업에는 등한시하여 농사철이 되어도

항상 이웃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어져서

부근 주민들이 농사일에 늦은 곳이라는 뜻으로

불려온 것이 마을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 범어동(泛魚洞)
옛날 그 일대 산의 모습이 마치 붕어가 입을 벌리고 

산 아래 흐르는 냇물(泛魚川)에 떠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마을의 이름을 뜰 범(泛), 

고기 어(魚)를 합하여 범어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역을 설치하여 

마을이름을 따서 범어역이라고 하였다.
1914년 범어동이라고 개칭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 범물동(凡勿洞)
옛날에는 이곳 뒷산에서 범이 많이 울었다고 

범울이, 범물리 라고 불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전리(泥田里)와 가동(佳洞)을 병합하여
범물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 황금동(黃金洞)
원래 이 마을 주변 들판에는 곡식이 황금빛이고,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황청리 (黃靑里)라고 불렀다.
1914년 인근의 소지천동을 병합하여 황청동(黃靑洞)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70년대 황청동이 주민들의 민원으로 

지금의 황금동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