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현충원 안의 부끄러운 귀신들.

우현 띵호와 2024. 9. 30. 21:38

현충원 안의 부끄러운 귀신들.   

(엄상익변호사)

소설가 정을병씨가 살아 있을 때 친했었다. 
그는 소설은 몸으로 써야 한다는 

문학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시절 그는 국토 건설단에 직접 들어가

체험을 하고 ‘개새끼들’이라는 소설을 써서

강제노동을 폭로했다.

그 댓가로 문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했다.

세월이 흘러 그가 노인이 된 어느 날 국가에서

증명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민주화 운동에 공헌한 인물이라는 내용이었다.

간첩에서 민주화 투사로 변한 것이다.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일제시대를 살았던 

소설가 김동인의 친일 사건을 맡고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김동인의 작품을 배웠다. 

그는 해방직후 김구 주석의 일대기를 쓰는 

민족주의 작가로 존경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해방 육십 년이 지난 후 갑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뒤늦게 생긴 위원회에서 결정이 됐다.

일제시대 쓴 그의 작품 중에 친일 성향의

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들은 정을병씨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란 양면성이 있어요. 절대 영웅도 없죠. 

인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치부가 있는 거죠. 

다만 세상이 필요에 따라 영웅으로 만들 뿐이에요. 

우리가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나 이봉창의사도

접근해 보면 큰 흠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겁니다.

다만 역사에서 힘을 잡은 측이 모든 걸

흑백 이분법의 논리로 단죄하죠.”

내 말을 듣던 그가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하죠. 

며칠 전 신문을 보다가 한 구석에서 항일 운동가 

아무개 선생이 죽었다는 기사를 봤어요. 

죽은 그 양반의 사진을 보면서 픽 웃었죠. 

왜 그랬는지 알아요? 

내가 소설가 협회 회장으로 이름 석자 대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을 때였어요. 

하루는 그 사람이 찾아와서 정말 먹고 살기가 

힘든 데 한가지 방법이 있다는 거예요. 

항일운동을 했다고 보훈처에서 인정해 주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거죠. 

그 친구는 일제시대인 중학교 이 학년 때 

동네 뒷동산에 가서 나무껍질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것 때문에 경찰에 끌려갔다가 석방됐다는 거예요. 

유명한 글쟁이인 내가 신청서에 그 사유를 

잘 써주면 될 것 같다는 거죠. 

그래서 그 사연을 구구절절이 써 줬어요. 

단편소설 하나 써 준 셈이죠. 

안될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가 항일애국지사로 

판정이 난 거예요. 나도 깜짝 놀랐으니까. 

그 친구 죽을 때까지 정부에서 연금을 받았죠. 

그리고 죽고 나니까 항일 애국지사가 되어 신문에 나오네.”

“그런 엉터리 항일독립 운동가도 많겠네요?”
“많다 마다요. 실제로는 매국을 하고도

애국자가 된 경우도 있고 또 애국자이면서

친일파로 된 경우도 많을걸요.

친일문제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감정적이고

한번 우기면 시정하려고 하지를 않죠.

이완용 하면 무조건 매국노인데 그의 항변을

들으려 한 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나요?

우리에 비해 일본 사람들이 훨씬 정확한 면이 많아요.

우리는 조작이다 뭐다 해서 부인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본 기록들이 훨씬 더 당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진실하게 묘사하고 있을 거예요.

일본 자료들도 찾아서 그들의 시각에서 본 팩트는

어땠는지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거예요.”

그는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었다. 

또 강직한 작가이기도 했다. 

고향이 남해인 그는 임진왜란 때 칠 년이나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남해는 일본 사람의 피가 

섞인 경우가 많다고 한 글에서 썼다. 

눈썹이 검고 털이 많은 특징이 그것이라고 했다. 

그 글이 전해지자 고향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그를 이단자로 낙인 찍었다. 

그가 죽은 후 내가 다른 문인들과 함께 그의 문학 비를 

고향에 세워주는 운동을 할 때 고향 사람들은 그를 거부했다. 

진실이 불편했을까?

어제저녁 우연히 KBS탐사 보도 팀에서 취재한 

‘밀정’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봤다. 

취재팀이 백 년전 일본의 외교부나 군부의 문서를 열람했다.

그 안에는 조선인 밀정과 밥을 먹고 돈을 건네준

조선 주재 우쯔노미야 일본군 사령관의

꼼꼼한 일기까지 있었다.

안중근의사와 거사를 함께 했던 동지부터

김구의 비서까지 팔백 명이 넘는 친일파

조선인 밀정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그 밀정의 상당수가 해방 후 건국훈장을 받았고

지금은 국립 현충원에 애국지사가 되어 묻혀 있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사의 이율배반이라고 할까?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실이 허위가 되는 세상을 경험했다. 

본질을 보는 마음의 눈이 열려 그런 것들이 

바로 잡히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안두희는 왜 같은 당의 백범을 쏘았나? (再) -김구 바로 알기
1917년생 안두희는 당대의 엘리트였다.

1934년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3년 다녔다.

(정안기 박사에 의하면, 그 시절 압록강 변에서

‘할리 데이비슨’을 몰았던 귀공자이자,

평양기생과 재혼한 낭만주의자였다.)

소련을 등에 업고 김일성이 북조선에서 날뛰자,

1947년 고향 신의주를 떠나 서울로 왔다.

월남한 후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총무부장과

중앙 총무부장을 맡았다.

육사 8기에 육군포병학교, 육군보병학교도 거쳤다. 

그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을 쏘았다.

그는 줄곧 일기를 썼다고 한다. 

그가 남긴 백범 총격 당시의 서술은, 

집필 허락을 얻어 매일 검열을 거치며 구속 중 작성한 것이다.

1954년 백범과 관련된 자신의 일기를 “안두희 수기,

시역(弑逆)의 고민(苦憫)”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할 무렵,

‘옥중기로 창작한 위작’이라는 풍문도 돌았고,

출판의 동기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하니 당연한 일이겠다.

그는 1949년 8월 5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6.25 발발로 가석방과 동시 육군 소위로 복귀하여 참전하였고, 

1953년 12월 2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96년 10월 23일 가택을 침입한 버스 운전 기사 

박기서에 의해, 손이 묶이고 목이 졸리고 머리를 

봉으로 구타당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당하였다. 

사망 당시 79세.  박기서는 1998년 3.1절 사면 되어 

1년 5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안두희는 김구 살해 3개월 전인 1949년 3월경 

현역장교 신분으로 한독당 비밀당원이 되었다. 

김구는 군 내부에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던 듯 

그에게 자주 곁을 내주었다. 친필 족자도 두 폭 선물하였다. 

그런데, '거인'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이 가까이 접하면서

 빛이 바랬고, 백범 주변 인물에 대한 의구심도 커갔다.

‘당의 조직지령은 절대적인 것이며, 

지령에 움직이지 않는 자는 반동이다. 

탈당의 자유란 없다. 

반동자의 등 뒤에는 죽음의 제재만이 따를 뿐’이라는 

은근한 위협도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김구 살해의 배후가 이승만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 ‘자칭’ 진보주의자와 통일 지상론 자의

언설(言舌)은 무시할 만하다.

아래는 총격 당시 사정을 스스로 복기한 내용이다.
“... 그 동안 여러 차례 선생님께 직소앙문(直訴仰問)코자

애썼사오나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고,

본시 이런 회의를 갖는 것부터가 성스러우신 선생님의

정신을 모독함일까 저어 되어 감히 입 밖에 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으로서는 여기게 대하여 석연(釋然)히

그 내용을 밝히시어 저의 왜곡된 의심을 씻어 주심이

이런 혼란기에 처한 자제를 사랑하시는 길일까 하옵니다.”

“그래 말해 봐”
“국회 소장파와 선생님 사이에 일찍부터

내통되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정평이요,

이번 그를 피검시 '김약수'를 선생님께서 숨기셨다는

억측까지 가지게 되었던 것이 온데 선생님과

그들과의 관계는 정말 어떤 것입니까?”

“세상이 아무려면 어때 ? 또 공산당이라면 어때서?”
“그러시면 공통된 노선이란 말씀이십니까?”
“네 멋대로 해석하렴.”
“선생님께서 남북협상 당시 서울을 떠나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굳은 서약을 하시고서, 돌아오신 뒤에

왜 뚜렷이 대국(大局)의 전망과 선생님의 심경을

밝혀 말씀치 못하셨습니까?

무슨 숨은 사정이 계셨습니까?”

“그래 내 나라 내 땅을 갔다 온 것이 잘못이란 말이냐?”
“왜 모든 것을 국민 앞에 천명치 못하셨냐는 말씀입니다.”
“그래, 밤낮 반 쪼가리 땅에서만 살자는 말이냐?”
“협상 다녀오신 후에 태도는 어떠셨습니까?

미군의 철퇴를 주장하셨고, 미국의 원조를 거부하셨고,

유엔의 처사를 비방하시면서 급기야는

5.10 선거까지 부인하신 것,

어떻게 그렇게 그 주장하심이 공산당과 꼭 같으십니까?”

“그러면 이놈! 내가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단 말이냐?”
“전라도 방면을 순회하실 적에 정부를 부인하시고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지으시며 이(승만) 박사를

사대주의자의 전형적인 존재로 매도하셨으니

공적인 국면도 국면이오나,

그렇게도 국민 전체가 쌍벽으로 모시던 두 분의

교의가 끊겼다고 생각될 때에 온 겨레의 실망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래 이놈! 이것이 정부 구실을 한다는 말이냐? 

그리고 미국 놈이 무슨 전생에 은혜를 입었기에 

그리고 고맙게 적선을 할 것이란 말인가? 

대국을 좀 큰 눈으로 보아라.”

“그리고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무엇 하는 기관이며,

 '혁신탐 정사'는 누구의 것이며, 또 한독당의 소위 

'비밀당원 조직망'이란 무슨 사명을 부여한 결사입니까? 

'한국 군대는 김구씨의 군대'라는 외인의 평론에 대하여 

선생님은 무슨 말로써 반박하시렵니까? 

선생님, 제게 8.15 기념일을 전후하여 중대한 지령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비명령은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무어야? 이놈 죽일 놈!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여순반란은 누가 사주한 것입니까?”
“뭐야, 이 놈!”
“표 소령과 기거를 같이 한 놈은 어떤 놈입니까?”

“저런!”
책 뭉치가 날아온다. 얼굴에 맞았다.

나도 주먹을 부르쥐고 고함을 질렀다.
“송진우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벼루가 날아와서 머리를 스치고 뒷벽에 부딪친다.
“장덕수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이놈! 너 이놈!”
붓이 날아오고 또 책이 날아오고 종이뭉치가 날아오고 ...

앗! 선생께서는 그 거구를 일으켜 두 팔을 벌리고

성난 사자같이 엄습하여 오는 것이 아닌가...  

눈을 감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안두희 씀)
『나는 왜 김구선생을 사살했나』
*김구선생은 해방 전 중국서 독립운동을 한 공로는

인정하더라도, 해방 후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표면적으로는 남북통일 정부를 지향한다지만,

실은 북한 김일성의 편에서 활동했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김일성이 소련과 합작으로

대남 침략 준비가 완전히 된 상황을 확인하고,

멀지 않아 공산 통일정부가 된다는 확신으로,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립에 비협조적일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임을 자인하는 것을 확인한 안두희가

사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현재 이런 김구는 추앙을 받고,

이승만은 독제자로 폄훼하는 좌파들뿐 아니라

일반인들 역사 인식의 아이러니가 안타깝고,

이 자료로 인식이 바로 잡히길 바라면서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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