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33) *겨울에 부채를 선사한 이유.

우현 띵호와 2021. 9. 29. 23:02

방랑시인 김삿갓 (133)
*겨울에 부채를 선사한 이유.


평양 감사 다음 가는 높은 벼슬자리인 도사로

임백호가 평양에 왔을 때의 일이다.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관계로 ,

임백호는 수많은 명기들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수 많은 기생중에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기생은

오직 한우(寒雨)라는 기생뿐이었다.

왜냐하면 한우는 풍류를 알고 시를 알고 있어,

백년지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우는 워낙 지조가 굳은 기생인지라,

몸 만은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임백호는 일 년이 넘도록 한우를 만나 왔지만,

사내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초겨울 밤,

그날도 한우와 단둘이 술을 마시다가, 임백호는 불현듯

한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면서 한우에게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를 읊어 들려 주었다.

북창(北窓)이 맑다기에
우장(雨裝) 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오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결국 얼어 자게 생겼네.
이 시조에 나오는 는 기생 를 지칭한 말임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말하자면 임백호가 한우를 찬비에 비유하여 즉흥시를 한 수 읊어 댐으로서,

은연중에 한우와의 동침을 요구해 본 것이었다.
명기 한우가 임백호의 그런 심정을 못 알아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한우도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로 응수하여,

임백호의 소원을 흔쾌히 풀어 주었던 것이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로 얼어 자리
비단 이불 원앙베개
어이 두고 얼어 자리
오소 찬비 맞으셨다니
내 녹여 드리겠소.

김삿갓이 능란한 입담으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자,

노기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는 중에,
어떤 기생은 가벼운 한숨조차 지으며 넋두리 하듯, 말을한다.
"옛날 분들은 사랑을 해도 그처럼 멋지게 사랑을 했는데,

요새는 그런 풍류남아를 볼 수가 없네요."
이어서 또다른 기생이 말을 하는데,

"그런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에요.

임백호의 일화를 많이 알고 계시니, 한 가지만 더 들려 주세요."
김삿갓은 손을 내저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얘기는 그만 하고 댁으로들 돌아가시지요."
그러나 기생들은 누구도 일어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좀처럼 듣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한 가지만 더 들려 주세요."
그러면서 기생들의 시선이 모두, 김삿갓의 얼굴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마지못해 임백호의 일화를 또다시 아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임백호의 일화를 하나만 더 하기로 합시다.

임백호는 평양에 있을 때에 어떤 동기(童妓)하나를 무척 귀여워했다오.

그래서 한겨울 임에도 그애에게 부채를 하나를 선사한 일이 있는데,
그 부채에 임백호가 손수 써준 시가 유명하니, 그 시를 소개하지요."
그리고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보여 주었다.

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괴히 여기지 마라
너는 나이가 어려 아직은 모르리라마는
상사병으로 한밤중에 가슴이 탈 때면
한여름 무더위가 비할 바 아니니라.

莫怪隆冬贈扇枝(막괴융동증선지)
爾今年小豈能知(이금연소기능지)
相思半夜胸生火(상사반야흉생화)
獨勝炎蒸六月時(독승염증유월시)
기생들은 그 시를 읽어 보고 또다시 탄성을 질렀다.

"선생은 어쩌면 이같은 유명한 시를 좔좔 외고 계세요 ?

그러고 보니, 선생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 틀림없으신가 보죠 ? 그렇죠 ?

선생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시죠 ?"
김삿갓은 저물어 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나더러 시인이 아니냐구요 ? 허허허 ...

이미 말씀드린 것 처럼 나는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걸객에 불과한 사람이라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몇몇 기생들은

저쪽에서 무엇인가 쑥덕거리더니 별안간 "맞다,맞다 !

삿갓을 보니 그분이 틀림없어 ! 그분이 아니라면 옛날 시를 그렇게도 잘 알겠나."
하고 외치며 김삿갓쪽으로 우루루 몰려오더니,

김삿갓을 향해 이렇게 다그쳐 물어 보는 것이 아닌가.

"실례의 질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은 방랑시인 김삿갓 어른이시죠 ?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선생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틀림 없으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