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35) *죽향과의 첫 만남.

우현 띵호와 2021. 9. 29. 23:02

방랑시인 김삿갓 (135)
*죽향과의 첫 만남.

김삿갓은 똑같은 시를 두 번씩이나 감격스럽게 읊고 나서,
"도데체 이처럼 기가막힌 시를 누가 지었소이까 ?" 하고 일동에게 물었다.
"강촌모경"이 너무도 훌륭한 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촌모경을 지은 작자를 누구냐고 물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때문에 김삿갓은 불현듯

이 시는 남의 작품을 옮긴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여러분 중에 반드시 있을 것인데,

왜 들 대답이 없지요 ?

다른 사람의 시를 옮겨 쓴 것은 아니겠지요 ? "
하고 준엄한 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저쪽 등 뒤에서 아까부터 새치름하게 앉아 있던 기생이

얼굴을 바짝 들며 항의한다.

"선생님 ! 제 이름은 죽향(竹香)이라고 하옵니다.

 남의 시가 아니고 제가 직접 지은 시옵니다."
작자가 이름을 밝히고 나서는 바람에 좌중은 잠시 술렁거렸다.

그제사 자세히 보니, 죽향의 나이는 30대 중반이 넘었을까,

얼굴도 미인인 십인지상이었다.
"본인 작품이면 진작 말할 일이지, 왜 대답을 주저했지요 ?"
"선생님이 지나친 칭찬을 해 주셨기 때문에

너무 면구스러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죽향은 무척 내성적인 성품이 분명해 보였다.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물었다.

"시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기에 이렇게도 좋은 시를 지었소 ? 정말 놀랍소이다."
김삿갓이 죽향을 이같이 치켜 올리자, 다른 기생들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늙수구레한 기생이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한다.

"삿갓 선생은 저희들의 시를 모두 읽어 주셨으니

이번에는 선생님 시를 한 수 읊어 주세요."

"허허허, 나더러 시채(詩債)를 갚으라는 말씀인가요 ?

그런 빚이라면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김삿갓은 좌중에 어색한 분위기를 돌려놓기 위해

기생들과 똑같은 석 자를 써가면서
"연광정 (練光亭)이라는 즉흥시를 두 연이나 써갈겼다.

 

절연호흘입고문 截然乎屹立高門
깎아지른 절벽 위엔 높은 문이 서 있고

 

벽만경창파직번 碧萬頃蒼波直번
만경창파 대동강엔 푸른 물결 굽이친다

일두주삼춘과객 一斗酒三春過客
지나가는 봄 나그네 말술에 취했는데

천사유십리강촌 千絲柳十里江村
수양버들 마을은 십리나 뻗었구나.

독단목대내하색 獨丹鶩帶來霞色
외로운 따오기는 안개 속에 날아오고

쌍백구비거설흔 雙白鷗飛去雪痕
갈매기는 쌍쌍이 눈발처럼 휘나른다

파상지정정상아 波上之亭亭上我
물결 위에 정자 있고 정자위에 내가 있어

좌초갱야월황혼 坐初更夜月黃昏
초저녁에 앉았는데 밤이 깊자 달이 뜨네.

연광정 위에서 저물어 가는 대동강 풍경을 굽어보며

즉흥시를 써갈긴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죽향의 시에 대한 화답으로 읊었건만,

그러한 심정을 알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만 죽향만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날이 이미 많이 저물어,

김삿갓은 노기들과 더 이상 노닥거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일동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오늘은 여러분 덕택에 잘 얻어먹고 잘 놀았소이다.

불청객은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이렇듯 인사를 나누고 몇 걸음 옮기다가 불현듯 생각이 떠올라,

가까이 있는 늙은 기생을 붙잡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지금 평양에 살고 있을 가실이라는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요.

여러분들 중에서 혹시 그런 여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나중에 임 진사 댁으로 연락을 해 주기 바라오."

오줌이 약이 되기도 하는지라,

지나가는 말로 한번 부탁을 해둔 것이었다.

"어마...가실이라는 여인은 삿갓 선생의 애인이세요 ? 그 여인은 기생입니까,

아니면 여염집 가정 부인입니까 ?"

"가실이라는 이름만 알았지 나는 일면식도 없는 여인이라오.

다만 어떤 필요에 의해서 한번 찾아보고 있을 뿐인데

평양에서 기생으로 지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자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늙은 기생에게만 지나가는 말로 부탁하고 그자리를 떠나버렸다.

김삿갓이 임 진사네 별당으로 돌아오니,

임 진사가 반갑게 맞아주며 말하는데,

"오늘은 어디를 가셨다가 이렇게 늦으셨소 ?

영명사(永明寺)의 벽암(碧巖)대사가 오랫동안
선생을 기다리다가 , 조금 전에 막 돌아가셨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영명사의 벽암 대사요 ? 나는 그런 분을 모르는데,

그분이 무슨 일로 나를 기다렸다는 말씀입니까?"

"그야 물론, 삿갓 선생이 벽암 대사를 아실 리가 없지요.

그러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삿갓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까. 벽암 대사가 오늘 우연히 내 집에 들르셨기에

 말씀을 했더니, 벽암 대사는 선생을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하면서,

한나절이나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저녁 불공을 드리기 위해 돌아가셨지요.

모르면 모르되, 내일쯤 선생을 만나 뵈러, 다시 찾아 오실 겁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벽암 대사가 오시길 기다릴게 아니라

내일은 내가 찾아 뵙기로 하겠습니다.
벽암 대사라는 분은 어떤 스님입니까 ?"

"벽암 대사는 시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도가 매우 높으신 분은 확실합니다."
시를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시인이라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김삿갓은 내일은 영명사로 벽암 대사를 찾아가 볼 결심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