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77) *김삿갓을 찾아 온 여인은 ?

우현 띵호와 2021. 9. 30. 23:11

방랑시인 김삿갓 (177)
*김삿갓을 찾아 온 여인은 ?

김삿갓은 심원사에서 십여 일을 더 지내다가,

동지가 가까워서야 읍내로 돌아왔다.

그 무렵, 강계의 추위는 살을 에이는 듯 맹렬하였다.

눈은 오는 대로 계속 쌓였고, 모진 칼바람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부려,

솜옷을 입고서도 밖을 나다니기가 어려웠다.

김삿갓은 싸구려 객줏집을 숙소로 정하고,

날마다 방구석에 들어앉아 술을 마셔가며 책이나 읽고 있었다.

이렇듯 생전 처음 겪는 북쪽의 추위로 인해,

날마다 침울하게 지내자니, 따듯한 남쪽이 그리웠다.
(대동강도 우수경칩이 지나야 풀린다고 하는데,

그보다 훨씬 북쪽인 독로강의 얼음은 언제나 풀릴까?)

매일 방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궁상을 떨고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던 김삿갓,
문득, 날을 헤아려 보니, 오늘은 내일이면 새해가 되는 섣달 그믐날 이었다.
(허허 ..덧 없는 세월만 가는군. 내일이면 새해가 되렸다 ? )

김삿갓은 땟국이 꾀죄죄 흐르는 이불때기를 등거리 삼아,

이날도 할 일없이 독서에 열중해 있었다.

이때, 대문 밖에서 누군가를 찿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혹시 이 댁에 유숙하는 손님중에 이라는 분이 계시지 않나요 ? "
하고 묻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자기를 찾아 올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이름을 잘 못 들은 줄 알고, 여전히 책만 읽고 있었다.

그러자 객줏집 아주머니가 찾아 온 사람과

한동안 도란거리더니, 방 앞으로 다가오며,

"글쎄요. 우리 집에는 손님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지만,

그 양반 이름은 모르지요. 어디 한 번 물어 보기나 합시다."
그리고 방문 밖에 다가와서 안을 향해 묻는다.

"손님, 웬 여인네가 이라는 양반을 찾아왔는데,

혹시 손님을 찾는 것은 아닌가요 ?"
김삿갓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방문 앞에는 두툼한 솜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여인이 하나 서 있었다.

머리에는 명주 수건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여인은 김삿갓을 대번에 알아보았는지,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활짝 풀어 내더니,

허리를 공손히 수그려 인사를 하며, 말을 하는데,

"저는 강계 고을에 기생 추월이라고 하옵니다.

혹시 선생께서 이십 여일 전에 인풍루에서 쇤네에게
희롱의 편지를 주셨던 김립 선생이 아니시온지요 ? "

김삿갓은 그제서야 추월을 알아보고 내심 크게 기뻐했다.

"이제 보니, 그대는 노래도 잘하고 글도 잘한다는 추월인 모양일세그려.

나는 자네에게 희롱의 편지를 보냈다가 이라는 낙인이 찍힌 임이 틀림없다네.

그런데 어떤 일로 나를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 "

추월은 김삿갓이 틀림없음을 알고 나자,

잠시 아무런 말도 못한채 김삿갓만 바라 보았다.

그러다가 애원하듯 조그맣게 말했다.
"쇤네는 선생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사오니,

방안에 잠깐 들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무슨 애기를 하려는지 모르지만, 어서 들어오게 ! "
김삿갓은 일어서서 추월을 부랴부랴 방안으로 맞아들였다.
추월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옷매를 바로잡으며,

"쇤네는 선생님을 몰라뵙고, 방자스럽게도 모욕적인

답장을 올린 일이 한없이 부끄럽사옵니다.

늦게나마 용서를 비는 마음에서 큰절을 올리겠사오니,

너그럽게 받아 주시옵소서."

하고 김삿갓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김삿갓은 당황하였다.

"이 사람아 ! 자네 같은 미인을 다시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용서가 무슨 용서란 말인가....
그나저나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어찌 알고 찾아 오셨는가 ?"

그러자 추월은 무릎을 단정하게 꿇고 앉아,

차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추월은 인풍루에서 김삿갓의 를 받아 보는 순간,

이라는 불량배가 소세양과 황진이가 주고 받은 고사를 이용하여,

자기를 유혹하려는 줄 알고 몹시 불쾌하였다.
그리하여 이라는 답장으로 김삿갓을 호되게 꾸짖어 주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을 지 며칠 후,

심원사에 들렸다가 범우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라는 사람은 운수승(雲水僧)처럼 전국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유명한 방랑시인 이라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는 그 옛날 금강산에서 대선사(大禪師)인 공허 스님과

시 짓기 내기를 한 일이 있었는데, 공허 스님 조차,

김삿갓에게 꼼짝을 못 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추월은 범우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천하의 대시인을 불량배로 잘못 알고

모욕을 주었던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부터는 자신의 경망스러웠던 행실을 사과하기 위해,

강계 읍내에 있는 객줏집이란 객줏집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김삿갓을 찾아 다니다가, 오늘에서야 간신히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 오도록 감격스러웠다.
"이 사람아 ! 내가 자네에게 소세양의 편지를 표절해 보낸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자네가 그 편지가 표절임을 단박에 알아차린 것만 보아도,

오히려 나는 자네의 풍부한 학식에 정말 놀랐다네 ! "
추월은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이 들며, 말했다.

"황진이와 같은 답장을 저에게서도 꼭 받고 싶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써올리겠습니다."

"하하하... 황진이가 소세양에게 보낸 것과 같은 답장을

보내 줄 용의가 있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네그려 ! "

이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무르익어 오고 있었다.

추월은 문득 김삿갓의 옷 주제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하는데,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을 오늘부터 저희 집에 모시고 싶사오니 허락해 주십시오."

김삿갓은 생전 처음 겪는 강계의 엄동설한과 궁핍한 생활에

시달려 온터인지라, 추월의 뜻밖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사람아 ! 나는 돈 한푼 없는 처지일세.

그런 나를 어쩌자고 자네 집에 데려가겠다고 하는가..."

그러나 추월은 잠시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돈에 눈이 어두워 선생을 저희 집으로 모셔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을 어찌 돈으로 비기겠습니까.

저는 다만, 공허 스님조차 당해 내지 못한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에

한걸음이라도 접근해 보고 싶어, 저희 집으로 모셔가고 싶을 따름이옵니다.

바라옵건데 저의 간절한 염원을 기꺼이 들어 주시옵소서."
김삿갓으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허허허, 동가식 서가숙 (東家食 西家宿)하는 나로서야,

자네 집으로 데려가 주기만 한다면, 어찌 마다 하겠는가.

그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일세."
이리하여 김삿갓은 추월을 따라, 숙소를 그녀의 집으로 옮겨갔다.

추월의 집은 인풍루가 멀리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있었다.
비록 집은 초가집이었으나, 몸체와 아래채가 규모 있게 짜여진 아담한 집이었다.
게다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안마당 한복판에 백 년도 훨신 넘어 보이는 오엽송(五葉松)

한 그루가 있어서 백설이 만건곤한 한겨울에 독야청청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마당에 멋들어진 소나무가 있는 것을 보니

자네는 소나무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네그려."

"저는 이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이 집을 엄청나게 비싼 값을 주고 샀사옵니다.

그런 말을 주고 받으며 방안으로 들어오니,

바람벽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한 폭 걸려 있었다.

부귀공명가차휴 (富貴功名可且休)
인간사 부귀영화 탐하지 말고

유산유수족오유 (有山有水足敖遊)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노닐어 보세

여군공와일간옥 (與君共臥一間屋)
정든 님 모시고 호젓한 오두막에서

추풍명월성백두 (秋風明月成白頭)
갈바람 밝은 달과 함께 늙어나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