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09)배과수원 주인

우현 띵호와 2021. 10. 6. 19:22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09)배과수원 주인

아이들 배서리에 몹시 화가난 오생원

송사해도 안되자 팻말을 세우는데…

오 생원이 하루에도 몇번씩 얼굴을 마주하는 한동네 사는

세사람을 발고(發告), 사또 앞에서 송사가 벌어졌다.

그들의 죄목은 서당 다니는 자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구쟁이들이 밤에 오 생원의 배 과수원에 들어가 서리를 하다가 잡힌 탓이다.

애들은 종아리가 찢어지도록 회초리 타작을 당했고,

그 부모들은 배값으로 열닷냥씩 내라는 소송이었다.

사또가 오 생원에게 물었다.
“밤에 과수원에 들어온 학동들을 잡았을 때 그 녀석들이 배를 몇개씩 땄는고?”

오 생원이 “어흠 어흠” 헛기침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때는 한개밖에 안 땄지만 그간 수없이 도둑맞은 게

모두 그들 짓이라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요.”

사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래 참외밭 수박밭 복숭아밭 자두밭엔 서리꾼들이 조금씩 축을 내는 법이거늘,

그걸 가지고 송사까지 벌일 일이 있는가.

오 생원은 어린 시절에 서리를 한 적이 없는가?”

오 생원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단연코 없습니다. 남이 애써 가꿔놓은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참외든

복숭아든 훔치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도둑질!”
발고 당한 세사람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오 생원! 입은 가로 째져도 말은 바로 하자고.

참외서리 오얏서리 수박서리에 항상 자네가 앞장섰잖아.”
그러자 사또가 호통쳤다.
“송사거리도 안 되는 일에 매달릴 만큼 내가 한가롭지 않을지고!”

동헌에서 나온 세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구 밖 주막에서

대포 한잔 하자며 오 생원의 소매를 끌었지만

그는 홱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혼자 가버렸다.

오 생원은 그날 이후 관솔 횃불을 들고 사나운 삽살개와 함께 밤새도록

과수원을 돌아다녀 동네 아이들이 더 이상 배 서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 생원네 배는 극만생종 꿀배라고 소문이 나 저잣거리 장사꾼들이

앞다퉈 과수원을 찾아와 소달구지에 몇자루씩 싣고 갔다.

추석이 다가오자 오 생원네 과수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십리 밖에서, 삼십리 밖에서도 배를 사러 왔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오 생원이 밤새도록 삽살개를 데리고 배 도둑을 지키다가

동틀 무렵 원두막에 올라가 겨우 눈을 붙였는데

헐레벌떡 맏형네 머슴이 부고(訃告)를 들고 왔다.

큰형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눈물이고 곡이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과수원 걱정이 태산이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형님은 하필 이맘때 돌아가시면 어쩌란 말인가.

배가 익기 전에 돌아가시던가, 추석 지내고 돌아가시던가 ….”

오 생원은 손바닥으로 원두막 바닥을 냅다 쳤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흠집이 나서 팔지 못하는 배 한자루를 맏형네 머슴 등짝에 얹어 보내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오 생원이 무릎을 ‘탁!’ 쳤다.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주인만 아는 배 하나에 청산가리를 넣었음.’
오 생원은 길가, 배 과수원 입구에 이렇게 쓰인 팻말을 세운 뒤

맘놓고 오십여리나 떨어진 큰형님댁으로 문상을 갔다.

큰형님 장례는 당초 칠일장으로 치르려 했으나

오 생원이 삼일장을 우겨 오일장으로 절충되었다.

장례를 마치고 부리나케 과수원으로 달려왔더니 새벽닭이 울었다.

원두막에서 눈을 붙이고 일어난 오 생원은 평소와 달리

장사꾼이 줄 서서 기다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입구에 자신이 세워놓은 팻말을 보고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팻말의 글귀 아래에 이런 글귀가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주인도 모르는 배 하나에 청산가리를 넣어 청산가리 배 합이 두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