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33) <보은>

우현 띵호와 2021. 10. 10. 02:46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33) <보은>

물에 빠진 노인 살려준 필동

지관인 노인의 말 듣고

선친 묘를 명당으로 옮기는데…

장마가 시작되려나, 지난밤에 큰비가 왔다.

두달 전 장례를 치르고 주인집 오 진사네 산자락 끝머리에

땅 한평 얻어서 아버지를 묻고 올려놓은 봉분이 걱정돼

필동이는 먼동이 트자마자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발밑의 개울은 으르렁 거리고 흙탕물이 휘돌아

묘터를 갉아먹어 관이 삐죽이 드러났다.

정신없이 삽질을 하는데 “어푸 사사사람 어푸 사사살려~”

필동이 돌아보니 황톳물 급류에 노인 하나가 떠내려가는 게 아닌가.

필동이는 물에 풍덩 뛰어들어 주먹으로 노인의 얼굴을 쳐서 기절시킨 후

그의 멱살을 잡고 함께 급류에 휩쓸렸다.

둘은 급류 속으로 사라졌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다가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왔다.

기운이 쏙 빠진 필동이가 개울가 뻘밭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깡마른 체구의 노인네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필동이 발치에서

아직도 기절한 채 모로 누워 있었다.

필동이 숨소리가 잦아질 즈음, 노인네가 정신을 차렸다.

기운을 차린 필동이가 노인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제 아버지 묘터로 달려가자 노인도 따라갔다.

필동이가 제 아비 봉분을 수습할 때 꾀죄죄한 노인은 주머니에서

뭔가 끄집어내 그걸 보며 묘 터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필동이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땀을 훔치자 그 옆에 앉았다.

“젊은이, 내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네.”
“어쩌다가 빠졌어요?”
“물 속에 살짝 잠긴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후~” 노인네가 한숨을 토했다.
서로 얘기가 오가며 상대방을 알게 되었다.

필동이는 천석꾼 부자 오 진사네 집안일을 총괄하는 집사(執事)요,

노인네는 풍수지리에 관상까지 보는 지관(地官)이다.

“여기가 선친의 묘터란 말이지. 끌끌끌.” 노인네는 혀를 찼다.
그날 밤에도 부슬부슬 비가 왔다. 삼경무렵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두사람이 필동의 선친 묘지에 다다랐다.

봉분을 파헤쳐 관을 꺼내더니 못질한 관 뚜껑을 열어 시체를 꺼내 가마니에 넣고,

관 뚜껑은 덮어 빈관을 제자리에 놓고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었다.

노인네가 앞서고 제 아비 시신을 구겨넣은 가마니를 지게에 짊어진 필동이 뒤따랐다.

개울을 따라 산골짜기까지 이십여리나 올라왔을까.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다 왔네.” 노인네가 꽂혀 있던 말뚝을 뽑았다.

쉴 틈도 없이 말뚝자리 땅을 파 허리춤까지 깊어졌을 때 지게 위의 가마니를 넣고

흙을 덮은 후, 조심스럽게 떠냈던 풀을 덮어 평지로 원상복구했다.

노인네는 뽑은 말뚝을 위쪽으로 열걸음쯤 되는 지점에 박았다.

빗줄기는 쉼 없이 쏟아졌다.

이튿날, 비가 그치고 아침해가 떠올랐다.

김 참판 선친의 상여 행렬이 만장기 물결을 이루며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가 산골짜기로 꺾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김 참판의 숙부가 고개를 갸웃하며 “지관 어른 이 자리가 맞소?”

노인네가 패철을 꺼내 보더니 “말뚝이 그대로 박혀 있잖소.”

땅을 파고 하관을 하고 곡소리가 산골짜기를 꽉 채우고

상두꾼들의 “어~ 어~ 달구야.” 합창이 점점 가늘어지며

지관 노인네의 하산 발걸음은 빨라졌다.

그 후, 필동이는 오 진사네 집을 나와 지관 노인네를 따라다니며

풍수지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십여년이 흘렀다.

노인네는 백발이 성성해 당나귀를 타고 다니고 필동이는 오십줄에 접어들었다.

그날도 산세를 보다가 필동이가 물었다.

“천하 명당자리에 선친을 묻었으니 내인생 후반 팔자가

화~악 펴진다 했잖습니까. 아직도 이렇게 당나귀 고삐나 잡고 있으니…”

노인네는 껄껄 웃으며 “일간에 자네 아들이 어사화를 쓰고 자네를 찾을 걸세.”

필동이는 따라 웃으며 “내게 무슨 아들이 있다고, 허허허.”

며칠 후 정말 백마를 탄 헌헌장부가 어사화를 쓰고 필동이에게 큰절을 올리며

“아버님, 소자 인사 올립니다.”

천하의 바람둥이 오 진사는 벌써 죽었지만 이 여자 저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열명도 넘었다.

본처의 아들 셋 중, 막내아들이 바로 필동의 핏줄인 것이다.

넓은 미간, 긴 인중이 빼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