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가올 시간이지만 이미 충분히 예견된 탓에
낯설지 않은 미래를 이렇게 부릅니다.
노후야말로 ‘오래된 미래’ 중 하나지요.
‘생로병사’라는 피해갈 수 없는 외길에서
지금의 이 단계를 지나면 다음 코스에서는
뭐가 나올지 우린 다 알지요.
다 알기 때문에 오래되었고,
그럼에도 아직은 오지 않았기에 미래인 거지요.
지난 4월 5일부터 6일까지 평사리 최참판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 시낭송
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낙엽따라 가버린 젊음 (0) | 2021.11.20 |
|---|---|
|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0) | 2021.11.20 |
| 하루에 한가지씩 행복플러스 (0) | 2021.11.19 |
|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 (0) | 2021.11.18 |
| 인생의 품격 (0) | 2021.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