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글

우리는 보석같던 나라의 後裔입니다. "

우현 띵호와 2024. 2. 9. 01:43

우리는 보석같던 나라의 後裔입니다. 

어제보다는 추위가 누그러진듯해 빠른 걸음으로

산책길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춥기는 하지만 마음에 자리잡은 혼란은 가시지 않습니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가요?
서로 돕고 아끼며 살던 "배달민족"이었는데 

살기가  조금 넉넉해지고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세계와의 교류가  많아지고 교육을 통한 

외래사조가 넘치면서 人性이 변하고 

是非善惡을 가늠하는 기준이 달라진듯 여겨집니다.
매우 답답하고 걱정입니다. 

이러다 눈앞의 위난도 혹시 파악하지 못하는 

愚를 범할가? 걱정합니다.

" 우리는 보석같던 나라의 後裔입니다. "
한국사람들은 원래 선한 품성을 가진

백의민족(白衣民族)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작은 벌레의 생명조차도 

가볍게 여기지 않아서 뜨거운 개숫물을 

마당에 버릴 때에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워이 워이!” 하고,
물이 뜨거워 벌레들이 다칠 수 있으니 

어서 피하라고 소리쳐 알릴만큼 다정다감하고 

정이 넘치는 선한 민족입니다. 

봄에 먼 길을 떠날 때에는 오합혜(五合鞋)와  

십합혜(十合鞋),두 종류의 짚신을 봇짐에 넣고

다녔는데 십합혜는 씨줄 열 개로 촘촘하게 짠 

짚신이었고 오합혜는 다섯 개의 씨줄로 엉성하게  짠

짚신을 가리키는 신발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행인들은 마을길을 걸을 땐 십합혜를 신고 걷다 

산길이 나오면 오합혜로 바꾸어 신곤 했습니다. 
벌레가 알을 까고 나오는 봄철에 벌레들이 

깔려 죽지 않도록 듬성듬성 엮은 짚신을 

신은 것입니다. 

오합혜는 십합혜보다 신발의 수명이 짧았으나 

그 만큼 벌레의 수명은 늘어났고 농부들은 

동물의  끼니까지 살뜰히 챙겼었습니다. 

콩을 심을 때엔 세 알씩 심었습니다. 
한 알은 땅 속에 있는 벌레의 몫으로, 

또 하나는 새와 짐승의 몫으로, 

마지막 하나는 사람의 몫으로 생각했더랬습니다. 
가을이면 감나무 꼭대기에는 ‘'까치밥’'을 남겨놓고 
들녘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도 "고수레" 하면서 
풀벌레들에게 음식을 던져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미덕(美德)은 우리의 식문화에도 그대로 배어났는데
여인들은 3덕(三德)이라고 해서 식구 수에 

세 명의 몫을 더해 밥을 짓는 것을 

부덕(婦德)으로 여겼습니다. 
걸인이나 가난한 이웃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미국 여류소설가 "펄 벅"은 그녀의 장편소설 

'‘살아 있는 갈대'’에서 한국을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로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그녀의 극찬은 한국에서 겪었던 특별한 체험 

때문이었는데 1960년 펄 벅이 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을때,
여사는 늦가을에 군용 지프를 개조한 차를 타고 

경주를 향해 달렸습니다. 

노랗게 물든 들판에선 농부들이 추수하느라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었는데 차가 경주 안강 부근을 
지날 무렵, 볏가리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지게에 볏짐을 가득 짊어진 농부가

소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는데
여사는 차에서 내려 이 신기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여사가 길을 안내하는 통역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 농부는 왜 힘들게 볏단을 지고 갑니까? 

달구지에 싣고 가면 되잖아요?” 

“소가 너무 힘들까 봐 농부가 짐을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요.” 
여사는 그때의 충격을 글로 옮겼습니다. 

“이제 한국의 나머지 다른 것은 더 보지 않아도 알겠다.

 볏가리 짐을 지고 가는 저 농부의 마음이 바로 

한국인의 마음이자, 오늘 인류가 되찾아야 할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이다. 

내 조국, 내 고향, 미국의 농부라먼 저렇게 힘들게 

짐을 나누어 지지 않고, 온 가족이 달구지 위에 

올라타고 채찍질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농부는짐승과도 짐을 나누어 
지고 한 식구처럼 살아가지 않는가.” 

구한말 개화기에 한 선교사가 자동차를 몰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커다란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할머니를 

보고 차에 태워드렸습니다. 
저절로 바퀴가 굴러가는 신기한 집에 올라탄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지셨습니다. 

뒷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짐을 머리에 계속 이고 있었기에
“할머니, 이제 그만 내려놓으시지요?" 하는
선교사의 말에 할머니는 순박한 웃음을 지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아이고, 늙은이를 태워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떻게 염치없이 짐까지 태워달라고 할 수 있겠소?” 

차를 얻어 타고서 차마 머리에 이고있던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선한 마음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어령 장관의 부친은 6·25의 피난 때에도 

남의 밭을 밟지 않으려고 먼 길을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가족들이 오랫동안 가슴을 졸이며 

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는데
우리 백의민족의 가슴에는 이런 선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은 적장의 전의까지 빼앗아버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봄

‘'사야가(沙也加)'’라는 스물 두 살의 일본 장수가

조선 땅을 침략하는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 이었던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진격하다

피난을 떠나는 농부 가족을 보았는데. 
왜군들이 총을 쏘는 와중에도 농부는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아이들과 함께 산길을 오르고 있었답니다. 

젊은 장수는 자기보다 노모의 목숨을 더 중히 여기는 

농부의 모습을 보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답니다. 
칼날처럼 번뜩이던 살기는 한 백성의 지극한 효심에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말았고. 
“도덕을 숭상하는 나라를 어찌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왜장 "사야가"는 그날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착한 백성들을 죽이는 전쟁은 불의라는 

결론을 내려 마침내 "사야가"는 부하 500여명과 함께 

조선에 투항하기로 결심했더랍니다. 
승전을 거듭하던 침략군이 '인의(仁義)'를 이유로

힘없는 나라에 집단 망명한 사례는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조선에 투항한 "사야가"와 그의 병사들은 

자신의 동료인 왜군들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 
그가 바로 역사에 남은 조선이름 "김충선"입니다. 
백범 김구가 꿈꾼 나라는 선(善)으로 우뚝 서는 
''문화의 나라''였습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強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김구가 사랑한 조국이 
맞는가요?
적국의 장수까지 무장해제시킨 선한나라의 
모습인가요?
나라의 물질은 유사 이래 가장 부유해졌으나 

정신은 더 가난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과 당이 극한으로 대치하고, 

국민의 대변자란 분들이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 생각하고, 

심지어는 성직자란 분이 영부인을 음해하고 

국민들이 보고 배워야할 지도급인사들이 

파당을 지어 무리를 만들고 혼란을 야기하는 

이 현실이 시리도록 가슴이 아픔니다.

사랑합니다! 응원합니다! 함께합니다!
경제적 발전에 알맞는 국민성을 기대합니다.
이해와 배려로 섬기고 모시는 민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소 정진하시듯 우리의 환경이 알맞게 진화하고 

발전하기를 갈망합니다.
오래전 교육계에 투신, 일생을 헌신하고 

정년퇴임한 다정한 친구가 보냈던 글을 

반성의 자료로 이끌어 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믿고 따르렵니다.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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