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한국의 마타하리 배정자(裵貞子)

우현 띵호와 2021. 7. 14. 01:21

한국의 마타하리 배정자(裵貞子)

이토 히로부미 애첩 배정자에 고종까지 미모에 반해 ....

도쿄 화류계의 색마 이토 히로부미 양녀이자 애첩 배정자....​

이토 히로부미 양녀로 일본에 충성을 바친 조선여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배분남으로 1870년 경남 김해에서 아전 배지홍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이 민씨들의 권세를 반대하다 흥선대원군의 일파로 지목되어

사형을 당하자 그녀는 천민 거지가 되어 유랑생활을 하다가

기생으로 팔려갔고 곧 도주해 승려가 되었다.

승려생활 중 탈주해 아버지와 친했던 동래부사 정병화에 의탁했다.

정병화는 1885년 배분남을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에서 배분남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와 있던 김옥균을 만나고

김옥균은 1887년 한일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에게

그녀를 소개해그녀는 이토의 양녀가 되었다.

배분남은 머리가 좋고 타고난 미녀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장미꽃 같은 18세 소녀 배분남을 보자 홀딱 반하여 양녀로 삼았다.

이토는 친구들과 도쿄 신바시의 화류계를 누비고 다니는 색마인지라

일본 여인과는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조선 미인 배분남을 그냥 두지 못해

첩으로도 삼았다.

이토는 배분남에게 일본 이름인 전산정자(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를 붙여주고

수영, 승마, 사격, 국제예절, 변장술 등 스파이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조선인들은 그녀를 배정자라 불렀다.

 

이토는 밀정교육을 받은 배정자를 1894년 조선으로 보내

하야시 공사의 통역으로  고종에게 접근시켰다.

배정자는 타고난 미모와 애교에다 일본에서 배운 승마술,

일본어, 국제예절이 더하여 그야말로 최고의 지성미에다 멋을 갖춘 여인이었다.

 

궁에서 유교식 예절 교육만을 받아 임금 앞에서 제대로 머리도 못 들고

묻는 말에 겨우 모기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궁중 여인들만 보다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면서 애교가 듬뿍 담긴 웃음을 지으며 접근하는

미녀 배정자를 보자 고종은 그녀에게 홀딱 반하였다.

 

고종을 손아귀에 넣은 배정자는 조선의 최고기밀을 빼내는 등

일본의 특급 스파이 역할을 쉽게 해낼 수 있었다.

 

배정자 암호명은 흑치마였다.

​배정자라는 누이를 잘 둔 덕분에 오라비와 동생은

한성 판윤 등 고위관직에 올라 권력을 휘둘렀다.

1905년 을사조약 후 고종에게 퇴위 압력까지 행사했던 배정자는

한일합방 후 만주로 가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한 일본군 스파이 활동을 했다.

항일 독립운동 조직에서 배정자를 처단 대상자로 지정하자

그녀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왔으나 곧 조선을 떠나 상해와 만주 등을

다니면서 1927년 58세 때까지 일본제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대가로 조선 총독부는 그녀에게 토지를 주고 해방이 될 때까지

매월 급여를 지급했다.

 

배정자는 첫 남편이 병사한 후 현영운과 재혼을 하였다.

그러나 현영운과 1년 정도 살다가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그 후에 현영운의 친구이자 친일파로 일본 육사 15기 출신인 박영철과 결혼했다.

박영철과 살림하다 이혼한 후 배정자는 연하의 부잣집 아들들과 살림을 했다.

51세 때 시베리아에서 일본군 첩자로 활동 중 마적단 두목과 동거하면서

정보까지 빼낼 정도로 대담했다.

 

55세 나이에도 30년 아래인 25세 일본순사와 동거할 정도로 그녀는 농염했다.

그녀에게 지켜야 할 윤리나 규범은 전혀 없었다.

 

오직 일본제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하고 대가로 대접을 받고 돈도 벌어

연하의 남자들과 섹스를 하며 인생을 즐겼다.​

배정자의 두 번째 남편 현영운은 역관 집안 출신으로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현영운은 부인 배정자 덕분에 고속 승진하여 육군 참장 및 농상공 협판(차관)까지 올랐다.

소설가로 유명한 현진건이 현영운의 조카이므로 배정자는 현진건의 숙모였다.​

배정자와 현영운과 사이의 딸이 현송자이다.

 

모친 배정자를 닮아 미인에다 일본 유학도 하여 지성미를 갖춘 사교계의 꽃으로

학무국장 출신 윤치오의 세 번째 부인으로 결혼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내고 한국 의학계 발전에 공이 많은 윤일선 박사가

윤치오 장남이므로 현송자는 윤일선 총장의 계모였다.

 

배정자와 윤씨 집안과의 관계는 아래 그림과 같다.

​​1920년대 50대 배정자(왼쪽부터), 배정자의 딸 현송자, 배정자의 조카 배구자.

윤치오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백부였다.

그러므로 배정자의 딸 현송자는 윤보선 전 대통령 백모였던 셈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친일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해 명망이 높았다.

젊은 미인 현송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친 현영운을 위해 30년 연상의

윤치오와 결혼했으나 교회에서 4세 아래 남자인 연희전문 학생 이철을 만나

불륜관계에 빠져 이혼했다

​이혼 후 이철과 결혼해 이철이 1933년 오케 레코드사를 출범시키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5가수 이난영, 남인수, 김정구, 장세정, 백년설 등이 오케 레코드 전속이었고

작곡가 박시춘, 손목인 등이 작곡가로 활동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현송자는 남편 이철이 사망한 후 독실한 신자로 살다가 79세에 사망했다.​

배정자 조카딸 배구자도 미인으로 배정자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무용을 배워

조선 전통무용의 현대화와 발레의 접목을 시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남편 홍순언과 함께 1935년 동양극장을 설립하여

해방 전에 조선의 공연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렇게 배정자 딸과 조카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가요계, 무용계,

연극계 등대중예술계를 주름잡았다.

 

한국전쟁 당시 쓸쓸하게 병사한 배정자

배정자가 이토 히로부미 양녀라는 설은 자신의 주장이거나 풍문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팩트이며 공식적 자료에도 없고요.

한편 배정자는 태평양 전쟁 때 '군인위문대'에서 조선 처녀와 부녀 100여 명을

징집하여 남양군도에 보내는 친일행위에 앞장섰다고도 합니다.

해방 후 배정자는 1949년 반민특위에 친일 행위로 구속되었지만

재판 도중 반민특위가 해산되며 풀려났고, 1952년 82세로 병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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