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40) *돈이 갖는 마성(魔性)

우현 띵호와 2021. 9. 29. 23:04

방랑시인 김삿갓 (140)
*돈이 갖는 마성(魔性)

김삿갓은 죽향이 타고 있는 배가 시시각각 멀어져 가는

모양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부랴부랴 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는

산속에 파뭍혀 버리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이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오니, 산골짜기에는 철쭉꽃이 붉게 피어 있었고,

숲속에서는 온갖 새들이 청량한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훈훈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이별의 슬픔을 달래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어 오는 것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만남 뒤에는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부모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조차, 영원이 함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만고의 이치가 아니던가.
김삿갓의 끝없는 방랑의 발길은 계속 이어졌다.

평안도는 워낙 산수가 험한 곳이어서,

안주(安州)로 접어 들었지만 산은 점점 더 험악하기만 하였다.

산이 험한 곳에는 인가가 드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험한 산골에도 인가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김삿갓은 밥을 굶은 채 진종일 걷다가,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서야 어느 촌락에 도착하였다.

안락촌(安樂村)이라고 부르는 그 마을은

옛날에 전쟁을 많이 치른 지역인지 마을 전체가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촌중으로 들어오니, 유관(儒冠)을 쓴 늙은이가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며 팔자 걸음을 하면서 유유자적 걸어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늙은이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정중히 수그리며 물었다.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날이 저물었는데,

이 마을에서 자고 갈 만한 집이 없겠습니까 ?"

그러자 늙은이는 김삿갓의 행색을 위 아래로 훝어 보더니,
"개천가에 객줏집이 있으니, 그리 가보게."
하고 씹어 뱉듯이 한마디 내던지고 저쪽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뭐 저런 늙은이가 있어 ! )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멀어져 가는 늙은이의 뒷모습을

한동안 멀거니 지켜 보고 있었다.

머리에 유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 딴에는 선비랍시고 행세하는 것 같은데,

수 많은 인생의 풍파를 겪은 늙은이의 태도도 아니고,

선비의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예 도 갖추지 못한 늙은이가 아닌가.
선비의 행색을 꾸렸으면 행실도 선비다워야 옳은 일이 아니겠나.
진짜 선비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의가 발라야 한다.

그 늙은이는 김삿갓의 남루한 옷차림만 보고 사람을 덮어놓고 업신 여겼는데,

그것은 사도(士道)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다.
김삿갓은 쓰디쓴 웃음을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겨,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다.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하룻밤 자고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인 아낙네는 부엌에서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며,
"일 없시요 ! 우리 집에서는 밥을 다 해먹었으니,

밥을 얻어먹고 싶거든 내일 아침에나 오시라요 !"
하며 숫제 거렁뱅이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두 집 세 집 대문을 더 두두려 보았으나

매정하게 거절해 버리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허허, 인심 한번 고약하군 !)
집집마다 그 모양 그 꼴이니,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돈을 주는

객줏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늙은이가 알려준 대로 개천가에 있는 객줏집으로 찾아 들어가니,

주인 아낙네는 김삿갓의 옷차림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우리 집에서 자려거든 돈을 먼저 내노시라요.

우리 집에서는 선금을 받지 않으면 손님을 재워주지않씨요."

하고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돈타령부터 꺼내 놓는다.

김삿갓은 부하가 치밀었다.
"에이, 여보시오. 나는 조선 팔도를 두루 돌아다녀 보았지만,

객줏집에서 선금을 내라는 소리는 처음들어 보오."
김삿갓은 자신의 행색을 보고, 선금을 내라는 소리에 은근히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주인 아낙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돈을 먼저 내고 싶지 않으면 다른 집으로 가보시라요.

우리 집에서는 재우기 전에 돈부터 받는다오 ! "

"평안도 객줏집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돈을 먼저 내야 재워준답디까 ?"
"우리 집에 왔으면 우리 집 방식에 따를 일이지,

쓸데 없이 남에 집 애기는 왜 물어 보시나요 ?

남에 집 일을 알아보고 싶거든 그 집에 가서 알아보시라요 !"
마을의 이름은 <안락촌>이건만, 마을의 인심은 조금도 안락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어쩔 수 없이 선금을 주고 객줏집으로 들어올밖에 없었다.
대동강변에서 죽향이 이별할때 배낭에 찔러 넣어 준 돈은 자그마치 백 냥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나도 백 냥 부자가 되었으니, 이만하면 한동안 돈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 ! )
하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돈이란 것이 애써 벌어 본 사람이 아껴쓰는 법인데,

김삿갓은 애써 돈을 벌어 본바 없으니 쓰는 것 조차 아껴 쓸 줄 몰랐던가.

그동안 안락촌에 이르기까지 돈을 흥청망청 썼던 관계로,

객줏집에 선금을 치루고 났을 때에는 돈이라고는 닷 냥밖에 남지 않았다.

(평안도 땅으로 들어와서는 밥을 공짜로 얻어먹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은데,

돈이 이렇게도 없어 가지고서는 어떻게해야 좋단 말인가 ?)

김삿갓은 오십 평생 <거지 생활>을 해오면서도,

돈 걱정을 해보기는 이때가 처음인 듯 싶었다.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어서, 돈이 워낙 없을 때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건만,

돈이 있다가 없어지고 보니, 돈 걱정이 새삼스러워졌다.

돈이 가진 마성(魔性)을 느끼는 순간, 김삿갓은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부인곤부빈곤빈 富人困富貧困貧
부자는 부자대로 걱정 빈자는 빈자대로 걱정

기포수수곤칙균 飢飽雖殊困則均
배가 부르나 고프나 걱정하기는 같도다

빈부구비오소원 貧富俱非吾所願
부자도 빈자도 나는 원하지 않고

원위불부부빈인 願爲不富不貧人
빈부를 떠나서 살아가고 싶노라.

김삿갓은 이와 같이,

부와 빈을 초월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