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6)<박 서방, 황 첨지 그리고 사또>

우현 띵호와 2021. 10. 9. 02:07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6)<박 서방, 황 첨지 그리고 사또>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박서방,

쟁기날 사려고 대장간으로…

돈통끼고 앉아 평상에서 약주마시는 팔자

좋은 황첨지가 부럽기만 한데…

보리 한골을 베고 난 박 서방은 허리가

두동강이 난듯 선뜻 일어설 수가 없다.

밭둑의 함지박에서 호리병을 꺼내 막걸리 한사발을

단숨에 들이켜자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이 사발에 떨어져

막걸리 반, 땀 반이다.

보리밭 한마지기를 베어 단으로 묶어 산비탈에 널어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별이 총총하다.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박 서방은

새벽같이 일어나 소를 끌고 쟁기를 매고 또다시 들로 나가야 한다.

이랴~, 보리밭을 갈아엎고 물꼬를 터 하루빨리 모를 심어야 한다.

모내기를 하고 나면 박 서방의 몸은 녹초가 되지만

또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최 서방네 모를 심으러 간다.

자기 논 갈라져도 품앗이는 빼먹을 수 없다.

장날, 박 서방은 부러진 쟁기날을 사러 장터 철물가게로 갔다.

쇠못부터 가마솥까지 철물로 만든 것은 없는 것이 없다.

가게 뒤에 있는 대장간과 솥공장에서

땅땅 망치질을 해대는 소리에 귀가 멍하다.

가게 한복판, 누각처럼 높은 평상에 황 첨지가 보료를 깔고

돈통에 팔꿈치를 걸고 비스듬히 앉아 있다.

황 첨지는 대여섯명의 점원이 철물 파는 걸 한눈에 내려다보며

약주를 마시고 불고기 안주를 입에 넣는다.

박 서방은 멍하니 황 첨지를 올려다보며 ‘나는 뼈가 부서져라 일해도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 바쁜데 저 영감은 무슨 복을 타고났기에

저렇게 팔자 좋게 살아가는가’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황 첨지는 저녁에 가게 문을 닫고 흐뭇한 미소를 흘리며

묵직한 돈통을 들고 사랑방에 앉아 돈을 헤아렸다.

하지만, 황 첨지는 요즘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반년 만에 한번씩 찾아오던 통풍이 작년부터는

두세달 만에 찾아오더니 올 들어선 한잠 터울로 찾아와

발가락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셋째 첩이 몰래 집을 팔고 다락 속의 금부처를 훔쳐

집사와 줄행랑을 친 지 한달이 넘었건만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황 첨지 걱정거리의 서곡에 불과하다.

칼자루를 쥔 사또가 문제다. 며칠 전 호출을 받고 벌벌 떨면서

동헌으로 갔더니 서슬퍼런 호통이 떨어졌다.

“이 노~옴,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포졸이 잡은 도둑 품속에서 비수가 나왔는데,

그 비수를 황 첨지 대장간에서 맞췄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죄가 될까마는 사또가 작정을 하고 황 첨지를 옭아매려

사사건건 시비를 거니 배겨낼 재간이 없다.

황 첨지가 주안상을 차려놓고 이방을 불러 타진했다.
“글쎄올시다. 우선 일만냥쯤 마련해 두시오.”
일만냥! 봄 여름 가을 죽도록 장사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사또에게 바치려 하니

울화통이 터져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또는 촛불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치부책을 뒤적인다.

황 첨지한테 일만냥을 뜯어낸다 쳐도 삼만냥이 모자란다.

‘이걸 어디서 긁어모은다? 옆 고을에 암행어사가 다녀갔다지.

삼년 전에 오만냥을 한양의 민 대감에게 갖다 바치고

사또자리를 얻었는데 올해가 마지막 임기라 본전을 찾았다만.

또다시 오만냥, 아니 요즘은 사또 값이 올라서 칠만냥이나 한다지….’

사또는 요즘 잠을 못 자는 정도가 아니라 공황장애로 식은땀이 흐르고,

벽에 기대어 깜빡 조는데도 “암행어사 출두야~” 악몽에 환청까지 겹쳤다.

‘이러면 내가 죽지, 내가 죽어.’
사또는 가슴속이 터질 것 같아 누비솜 바지저고리에 벙거지를 쓰고

몰래 동헌을 빠져나가 하염없이 걸었다.

저잣거리를 벗어나 어느 초가집 옆을 지나는데

봉창 밖으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대체 웃어본 지가 얼마나 되었나.’
사또는 봉창 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봤다.

볼품없는 작은 토방이지만 군불을 많이 지펴서 방이 뜨끈뜨끈한지

부부가 모두 홑바지 홑치마에 홑적삼을 입고 있었다.

개다리소반에 짠지 안주가 고작이지만 마누라가 호리병을 들고

술을 따르자 서방이 흐뭇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았다.

그렇게 마지막 잔을 비운 서방이 ‘후~’

호롱불을 끄자 바로 마누라의 비음이 들렸다.

“호호호, 간지러워요.”
초가삼간에 살지만 등 따습고 배부른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농사꾼 박 서방 내외다. 박 서방이 마누라 홑치마 끈을 풀었다.

사또는 요즘 수청 기생이 갖은 교태를 부려도 서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