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7)<도둑을 잡다>

우현 띵호와 2021. 10. 9. 02:08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7)<도둑을 잡다>

젊은 나이에 과부된 민진사댁 마님

잡혀온 도둑의 포승줄을 풀어 주고 술상까지 차리는데…

엊저녁에 온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이른 아침,

허리가 구부정한 늙은이가 어기적어기적 동헌 안마당에 들어서

사또를 직접 만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방 아래 졸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용건이 뭐냐고 묻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 진사댁 행랑아범이라는 걸 알게 된 졸개가 이방한테 아뢰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이방이 아직도 수청 기생을 껴안고 있는 사또에게 달려갔다.

사또가 후다닥 일어나 동헌 안뜰로 내려가

민 진사댁 늙은 행랑아범의 두손을 잡았다.

“간밤 삼경녘에 도둑이 들어 마님께서 하도 놀라 청심환을 드시고도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허~ 이럴 수가.”
사또가 이방·형방과 포졸들을 데리고

손수 눈밭을 헤쳐 민 진사댁으로 갔다.
“마님,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도둑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래, 무엇을 훔쳐갔습니까?”
마님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머리맡에 빼놓은 백통비녀랑 호박팔찌…

그것뿐입니다마는, 괘씸한 놈을 꼭 잡아주십시오.”

사또 일행이 왁자지껄 뒤뜰로 몰려가 도둑이 월담해서

마루까지 오느라 눈 위에 찍어놓은 짚신 자국을 유심히 살펴보고

환쟁이를 불러 그것을 그렸다.

민 진사는 10여년 전에 이승을 하직했다.

과부가 된 안방마님은 아직 나이 마흔도 안 되었는데

사또는 왜 이토록 쩔쩔 매는가?

도둑맞은 물건이라는 게 기껏 백통비녀 하나에

호박팔찌라 대단치도 않는데, 어찌해 사또가 이방·형방에

포졸들까지 데려와 야단인가?

민 진사댁 서른여섯살 안방마님의 백부가 바로 한양 조정의 판서로,

사또의 목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틀 만에 도둑을 잡았다는 전갈을 받고

민 진사댁 행랑아범이 동헌으로 달려갔다.

오랏줄로 꽁꽁 묶인 도둑이 마당에 꿇어앉아 있고

사또는 계단에서 직접 문초하고 있었다.

“네놈이 이틀 전에 민 진사댁 담을 넘어들어가

백통비녀와 호박팔찌를 훔쳐 달아났는가?”

땅바닥에 코가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둑이

고개를 쳐들고 멍하니 사또를 쳐다봤다.
“왜 대답이 없는고!”
사또가 고함치자 도둑이 이내 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네, 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곤장을 치려고 형틀을 내오는데 늙은 행랑아범이

사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한다.

“나으리, 마님께서 직접 문초하시겠답니다.”
사또는 어리둥절했지만 중죄인이 아니라서 포졸 둘을 시켜

도둑을 민 진사댁으로 보내 마루기둥에 묶었다.

안방마님이 나와 포졸들에게 열냥씩을 쥐어주며 관가로 돌려보내고,

행랑아범은 행랑채로 내보냈다.

그렇게 기둥에 묶인 도둑과 마님만 남았다. 키가 육척이요,

어깨가 떡 벌어지고 짧은 수염이 온 얼굴을 덮었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한 도둑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님이 기둥에 묶인 포승줄을 풀었다.

“날씨가 차네. 이리로 들어오게.”
벌벌 떨며 안방에 들어온 도둑이 윗목에 꿇어앉아

이마를 방바닥에 대고 읍소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마님.”
“일어나 편히 앉게. 어디 사는 누구이고, 하는 일은 무엇인고?”
마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여기서 오리 떨어진 갈래산속 외딴 너와집에 혼자 사는 박가라 하옵고,

약초 캐는 일을 합니다요.”

“나이는?”
“스물여섯입니다요.”
“스물여섯에 어찌하여 혼자 사는고?”
“삼년 전에 마누라가 애를 낳다가 죽었습니다요.”
도둑은 목이 메었다.

“박 서방, 저녁때가 되었네.”
박 서방 소리에 도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님은 부엌에 준비해 둔 백숙을 데워 술과 함께 내왔다.
술상을 치우고 촛불을 끄자 마님은 벌써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저께 밤처럼 나를 안아주게.”

먹구름이 몰려오고 우레가 내리치고 비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길고 격렬하게 일합을 마치고 마님은 박 서방의 팔베개를 베고

누워 베갯머리송사를 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술냄새를 풍기며 내 방에 들어와 품속에서 칼을 꺼내

나를 겁탈하고 바람처럼 사라진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십년 남짓 잠자던 내 몸이 깨어난 걸 알았네.”
박 서방이 마님을 꼭 껴안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닐세. 자네는 내 은인이야.”
마님은 또다시 숨이 가빠졌다.
“자네를 찾을 길이 없어 행랑아범을 사또에게 보냈지.” 

박 서방이 또 불뚝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