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홍범도는 누구인가?

우현 띵호와 2023. 9. 8. 00:51

홍범도는 누구인가?

1868년 평안도 편안부 서문 머슴의 아들로 출생

1883년 평양 감영 나팔수로 군입대 (16세때 나이를 3살 속여 입대)

1886년 조선군 상관이 나팔수가 그정도 밖에 못하느냐고 질책하자

            그날밤 칼로 상관이 배를 찔러 살해하고 탈영

1886년 탈영후 금강산 신계사로 도주

            출가직후 비구니 생활을 하는 비구니 이옥구를

            임신시켜 구설이 나돌자 하산

1886년 황해도 수안군 제지공장 취업후 3년 근무하였으나

            7달치 월급이 밀렸다고 밤에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도주

1896년 강원도 산골에서 사냥꾼 생활

1896년 강원도 의병 거병

           ( 일본이 총포 화약류 일제 단속으로 총포 압수하려고 하자 )

             이에 반발 사냥꾼 14명이 의병

1907년 함경남도 의병거병 ( 총포화약류 단속에 반발 ) - 혼자 거병

1911년 연해주로 이동

1917년 국제 간섭군 러시아 혁명 개입당시 적군과 합류

1918년 한인 사회당 적위군과 협력

1919년 대한 북로군독부 제1군 사령부장 -청산리 ,봉오동전투 참가

            (일본 경찰병력과 싸우다 일본 정규군 투입으로 후퇴 )

1919년 소련지원으로 이동휘와 독립군단 창설시도 - 자유시 이동

1921년 소련군 통제하의 고려혁명군 가담

1921년 자유시 참변후 - 재판위원으로 경쟁자 제거

1922년 모스코바 코민테른 극동민족대회 참석 (레린.트로츠키 독대)

            홍범도 자신이 이름이 새겨진 권총과 옷을 받음

1923년 홍범도와 반대파인 상해파 독립군 김오남 ,김창수 살해

             그로 인하여 소련군에 잡히자 래린으로부터 이런것을

             받은 사람이다라며 권총을 보여 주고 풀려남

1927년 소련 공산당 입당- 연해주 고려인자도자 대열합류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 오르다 극장 수위장 생활시작

1941년 독수전쟁반발 직후 73세 나이로 소련군 입대지원

     - 소련군 입대거부후 선전가로 활동하며 군입대 독려

     - 나는 늙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지금 파시스트들과 전쟁을 한다

     - 젊은이들 모두 무기를 들고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나서라고 독려

     - 소련군 입대할수 있다면 극장에서 사격시범

1946년 노환으로 사망

1993년 북한이 카자흐스탄에 홍범도 유해송환요구 거절

1995년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반발 -그는 고려인이다

2019년4월 문재인이 홍범도 유해 인도 요청

2021년 8월 홍범도 유해 인도 현충원에 안장

 

홍범도 자필 일지 내용

- 함흥 초리장 유채골 동네에 와 밤에 밤에 달려들어

  부자놈 아들놈 붙잡아서 일화 이만팔천구백원을 빼앗아

  군비에 쓴일이 있다

 

- 지서 주인놈은 자본가이다...

  삼년 고삯에서 일곱달 고삯을 못받고 야간에 그놈의 집에

  뛰어들어 그놈들을 다 죽였다

 

- 흥원군수 홍가 아들을 붙잡아 일화 삼만 칠천원을 빼앗고

  돈을 내가 요청하는데로 바치지 않으면 당장에 식구는

  오늘 밤으로 멸살시킨다고 협박하며 삼십만원으로 받치라고 한즉....

  이하 글은 글이 흐려서 식별불가

 

- 전성준 놈의 집에 야밤에 달려들어 일본돈 팔천사백 팔십원을

  달래 가지고 무달라 어귀에서 전성준 놈을 쏘고

  평안도 양덕으로 넘어가서 양덕으로 상천으로 달리면서

  산간으로 삼년을 혼자 의병을 하였다

 

자유시 참변 (소련이 해체 되면서 보관중이던 서류에서 확인된것임)

조선 독립군으로 대한 의용군과 고려 혁명군이 있었는데 

자유시 참변은 소련공산당의 지시와 지원을 따르는 고려혁명군이

소련과 함께 하길 거부하는 대한의용군 등을 강제로

소련군에 편입하는 것을 거부를 한 독립군을 학살한 사건

이때 홍범도 부대는 고려혁명군을 택했다.

그리고 대한의용군 등은

소련군과 고려혁명군에 의해 진압되고 학살되었다.

1921년 6월28일 장갑차 2대에 기관총 30여문으로

중무장한 소련의 적군(赤軍) 29연대와 코사크 기병 600여명이

대한의용군 등의 주둔지를 무차별 공격했다.

독립군은 1시간여 만에 전사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명, 포로 917명 등 피해를 입었다.

대한의용군이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 역량이 크게 훼손됐다.

이 사건이 자유시 참변이다.  

홍범도 부대가 소련공산당 노선을 따르는

고려혁명군과 소련 적군 측에 가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어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직후 대한의용군 등의

잔병(殘兵)을 처리하는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자유시 참변 후 홍범도의 행적

자유시 참변 다음해인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그리고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았다.

자신의 휘하 병력 300여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고

본인도 소련군 제5군단 민족여단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홍범도는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도 정식 입당했다.

소련 국적도 취득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독립군으로서의 활동은 없었다.

연해주에서 협동농장을 조직해 운영했을 뿐이다.

그러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됐다.

홍범도는 그에 순순히 따랐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의 삶은 소련공산당원이자

소련인으로서의 삶이었다. 

 

홍범도는 광복군과 아무 관계가 없다

광복군(光復軍)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중경(重慶)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는 군사조직이다.

1939년 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17일 성립식을 갖고 결성되었다.

광복군의 실질적 통솔인은 지청천과 그의 참모장인 이범석이었다.

결성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였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5월 말에 해산하였다.

이 같은 구체적 사실이 보여주듯 광복군은 공산주의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념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전혀 관계가 없었다.

소련의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던 소련공산당원이자

소련 사람인 홍범도와 광복군은 당연히 아무 관계가 없다.

고려공산당의 이동휘가 광복군과 관계가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이 광복군과 무관한 것과도 마찬가지다. 

 

홍범도가 생애 초반에 항일 무장 독립투쟁을 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공로에도 불구하고 자유시 참변 당시 희생당한

독립군의 반대편을 선택했다.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그의 책임의 정도를 어떻게 평가하든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리고 홍범도는 나중에 자유시 참변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소련공산당의 당원이자 적군의 대위가 되었다.

그런데 홍범도가 선택한 나라인 소련은 6.25전쟁 때

김일성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한 배후의 주동세력이었다. 

 

홍범도 소련 입국신고서

래린으로 부터 권총등을 하사받은 사유

자유시 참변 이후 재판했을 때의 공로를 인정을 받아서,

본인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그 권총도 레닌에게 받고

백 루블의 금화도 받았습니다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하사받은 권총으로 1923년 3월에

하바로스크에서 반대파 김창수와 김우남을 사살해서 죽여요.

그로 인하여 홍범도는 잡혀서 구속되었으나

레닌 증명서로 바로 석방이 됐습니다.

이것은 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내용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