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부대가 소련공산당 노선을 따르는
고려혁명군과 소련 적군 측에 가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어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직후 대한의용군 등의
잔병(殘兵)을 처리하는 재판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자유시 참변 후 홍범도의 행적
자유시 참변 다음해인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그리고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았다.
자신의 휘하 병력 300여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고
본인도 소련군 제5군단 민족여단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홍범도는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도 정식 입당했다.
소련 국적도 취득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독립군으로서의 활동은 없었다.
연해주에서 협동농장을 조직해 운영했을 뿐이다.
그러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됐다.
홍범도는 그에 순순히 따랐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의 삶은 소련공산당원이자
소련인으로서의 삶이었다.
홍범도는 광복군과 아무 관계가 없다
광복군(光復軍)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중경(重慶)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는 군사조직이다.
1939년 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17일 성립식을 갖고 결성되었다.
광복군의 실질적 통솔인은 지청천과 그의 참모장인 이범석이었다.
결성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였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5월 말에 해산하였다.
이 같은 구체적 사실이 보여주듯 광복군은 공산주의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념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전혀 관계가 없었다.
소련의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던 소련공산당원이자
소련 사람인 홍범도와 광복군은 당연히 아무 관계가 없다.
고려공산당의 이동휘가 광복군과 관계가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이 광복군과 무관한 것과도 마찬가지다.
홍범도가 생애 초반에 항일 무장 독립투쟁을 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공로에도 불구하고 자유시 참변 당시 희생당한
독립군의 반대편을 선택했다.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그의 책임의 정도를 어떻게 평가하든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리고 홍범도는 나중에 자유시 참변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소련공산당의 당원이자 적군의 대위가 되었다.
그런데 홍범도가 선택한 나라인 소련은 6.25전쟁 때
김일성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한 배후의 주동세력이었다.
홍범도 소련 입국신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