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죽림칠현(竹林七賢)

우현 띵호와 2024. 4. 30. 21:37

죽림칠현 (竹林七賢)  
난세를 피해 죽림에서 청담으로 생활한 일곱 명의 현인 
[대 죽(竹/0) 수풀 림(木/4) 일곱 칠(一/1) 어질 현(貝/8)]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숫자대로 傑(걸), 絶(절), 賢(현) 등을 붙여

기리는 경우가 많다.  
 
쉽게 떠오르는 것이 諸葛亮(제갈량)
關羽(관우) 張飛(장비)의 蜀漢三傑(촉한삼걸)이고,

詩書畵(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尹斗緖(윤두서)나

金正喜(김정희) 등 三絶(삼절)은 다수 있다.  
 
百濟(백제)를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成忠(성충) 興首(흥수) 階伯(계백)은
三忠神(삼충신)으로 추앙받는다. 
 
이런 중에서도 난세를 피해 죽림에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중국 南北朝(남북조) 시대

7명의 선비 七賢(칠현)이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포함되는 사람이 阮籍(완적)

嵇康(혜강, 嵇는 산이름 혜) 山濤(산도) 王戎(왕융)
劉伶(유령, 伶은 영리할 령) 阮咸(완함)
向秀(상수, 향할 向은 성씨 상)다. 
 
後漢(후한)이 망하고 三國時代(삼국시대, 220년~280년)

曹操(조조)가 떨쳤던 魏(위)나라는 司馬炎(사마염) 등

사마씨 일족의 晉(진)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후 외척과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난세가 이어졌다. 
 
환멸을 느낀 뜻있는 사람들은 老莊(노장)의

무위사상에 심취하여 죽림에 은거하며

술을 벗하여 청담을 이어갔다.  
 
대부분 명문귀족 출신의 칠현들은

숨 막히는 체제 속에서 사회를 풍자하면서

파란만장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씨의 회유에 끝끝내 저항한 혜강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唐(당)의 房玄齡(방현령) 등이 편찬한
‘晉書(진서)’에 완함 등 일부가 등장하지만

宋(송)나라의 문학가 劉義慶(유의경)이

명사들의 언행과 일화를 담은 ‘世說新語
(세설신어)’에 모두의 이름이 나온다. 
 
출신 지역을 나열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이 일곱 사람이 항상 죽림의 아래에 모여

마음 내키는 대로 술을 즐기며 지냈다 
 
(七人 常集干竹林之下 肆意酣暢/
칠인 상집간죽림지하 사의감창),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죽림칠현이라 불렀다 
 
(故世謂竹林七賢/ 고세위죽림칠현).’ 酣은 술즐길 감.  
 
이들 중 완적은 상대하기 싫은 위인에게는 흰
눈자위로 흘겨보는 白眼視(백안시),

혜강은 닭의 무리에 우뚝한 학이란 鶴立鷄群
(학립계군) 등 숱한 고사를 낳았다.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속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산수에 묻혀 고고하게 살아가려는

풍조는 우리나라에도 예가 많다. 
 
海左七賢(해좌칠현)으로 불리는 海東(해동)

죽림칠현은 고려 중엽 무신의 난(1170년) 이후

李仁老(이인로), 林椿(임춘) 등 선비들이

박해를 피해 산림에서 시와 술을 벗 삼아지냈다. 
 
李成桂(이성계)의 조선에 반대하여 경기도
開豊郡(개풍군) 광덕산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던

杜門洞(두문동) 七十二人(칠십이인)의 이야기도 전한다. 
 
고귀한 생활을 이어간 이들의 절개를 우러르면서도

난세를 헤쳐 갈 지혜를 사장시킨 것은

두고두고 아파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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