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45)비매, 그리고 두남자

우현 띵호와 2021. 9. 24. 22:54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45)비매, 그리고 두남자

기품있는 기생 ‘비매’
윤대감의 정성끝에 첩실로 들어가
딸 낳고 살던 중 윤대감 귀양 떠나
윤대감이 사약 받았단 소문 들리고
집담보 고리채 쓰다 궁핍에 몰리자
상처한 권판서 집으로 들어가는데…

비매는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조실부모하고

집안이 기울어져 어린 나이에 기생학교인 권번에 들어갔다.
흑단 같은 머리에 백옥 같은 살결, 반달 눈썹에 사슴 같은 큰 눈….

미모도 빼어났지만 얼굴엔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기품이 서려 있었다.

시조를 짓고 사군자를 쳐 팔폭 병풍을 만들기도 했다.

열여섯에 비매는 명월관으로 들어갔다.

비매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 장안의 한량들이 몸살을 앓기에 이르렀다.

누가 비매의 머리를 얹을 것인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지만 비매의 치마끈은 단단해 명월관을 찾은

뭇 한량들이 비매를 품어볼 수는 없었다.

마침내 허우대가 멀쑥하고 통이 큰 윤 대감이 3년여 정성 끝에 비매의 머리를 얹었다.

이튿날 아침, 요 위의 피를 보고 윤 대감은 감격해 삼청동에 기와집을 마련해서

살림을 차렸다.

비록 기녀 출신에 첩실이지만 비매는 조신하게 문밖 출입을 삼갔다.

예쁜 딸까지 낳아 윤대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 기묘사화로 조정은 피를 튀기더니

결국 윤 대감은 머나먼 청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비매는 딸을 부둥켜안고 털썩 주저앉고 윤 대감은 포졸들에 묶여서

속절없이 대문 밖으로 끌려나갔다.

춘하추동,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와도 우수수 낙엽 흩날리는 가을이 깊어가도

비매와 딸은 문을 꼭 잠그고 두문불출이다. 궁핍이 찾아왔다.

지붕에서 비가 새고 담이 무너져도 방치할 수밖에 없고

급기야 쌀독도 바닥을 드러냈다.

명월관 옛 동료들에게도 돈을 빌리고 결국 집을 담보로 고리채를 쓰다가

3년 만에 집에서 쫓겨날 판이 되었다.

매파가 찾아왔다.

“윤 대감께서 청산도에 귀양 가신지 이태 만에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도 들리고….”

비매는 눈물을 쏟았다. 매파가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권하는 혼처는

서촌 사는 권 판서로 상처한 홀아비였다.

매파와 셋이서 대면을 했다. 비매는 조건을 걸었다.

“소첩이 비록 궁핍에 지쳐 일부종사를 지키지 못하지만,

만약 훗날이라도 윤 대감님께서 살아서 돌아온다면

소첩은 모든 걸 미련없이 두고 윤 대감님에게 돌아가겠습니다. 약조해 주십시오.”

권 판서도 틀이 큰 인물로 비매의 손을 꼭 잡으며 “천지신명께 맹세코 약속하리다.”

여기저기 비매가 진 빚을 권 판서가 모두 갚아주고 삼청동 비매의 집 담보도 풀어줬다.

비매는 딸을 데리고 권 판서 집으로 들어갔다.

권 판서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비매는 제 배 속에서 난 아이 이상으로 어린 딸을 지극정성으로 키우고

시어머니에게도 효부노릇을 했다.

이듬해 비매는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아 권 판서와 시어머니는 입이 찢어졌다.

권 판서와 시어머니는 비매가 데려온 딸도 친딸, 친손녀처럼 귀여워했다.

비매는 5년간 내리 아들 셋을 낳아 손 귀한 이 집안의 보물덩어리가 되었다.

태평스럽던 이 집안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귀양갔던 윤 대감이 돌아온 것이다.

비매는 시어머니와 권 판서에게 큰 절을 올리고 윤 대감 사이에 난 딸을 데리고

삼청동으로 달려갔다. 어린 아들 삼형제도 두고, 쓰던 거울, 동백기름, 경대 등

모두 두고 맨몸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귀양살이 8년 만에 피골이 상접한 윤 대감을 안고 비매와 딸은 방성대곡을 했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보약을 짓고 닭백숙을 해 올리다 보니

또다시 쌀독 걱정을 하게 되었다. 짐작을 했을까 소문을 들었음일까,

권 판서가 거금을 보내왔다.

어느 날 윤 대감이 비매의 두손을 잡고 말했다.

“부인, 어린 아들 셋을 팽개치고 오는 법이 어디 있소, 가보시오.”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들 셋에 꽉 찼던 설움이 터져 이불에

얼굴을 묻고 많이도 울었다.
비매가 양쪽 집안을 왔다갔다 해도 아무도 욕하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