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01-26) *김립 훈장.(金笠 訓長)

우현 띵호와 2021. 9. 26. 23:43

방랑시인 김삿갓 (01-26) *김립 훈장.(金笠 訓長)

학성산 서쪽에는 표연정이 있어 , 동쪽 가학루와 쌍벽을 이룬다.
"가학루 보다는 서쪽에 있는 표연정이 더욱 좋으니

그쪽에도 한번 가보시죠."

누가 그렇게 일러주기에 김삿갓은 서슴지 않고 표연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표연정은 뛰어난 누각이었다.

주위에는 해송(海松)이 울창하고 숲속에서는 꾀꼬리가 영걸스레 울어대고
바다와 접한 남대천 일대는 갈매기가 부산스럽게 날아 다니고 있었다.
시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누각위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표연정자 출장제 (瓢然亭子 出長堤)

표연정은 긴 뚝에 우뚝 서있고


학거누혈 조독제 (鶴去樓穴 鳥獨啼)

학은 가고 빈 누각에 새만이 홀로 우네

십리연하 교상하 (十里煙霞 橋上下)

저녁노을은 십리에 뻗쳐 다리를 위아래로 감싸고

 

일천풍월 수동서 (一天風月 水東西)

하늘은 한 색 인데 달은 동서의 물결위에 흐른다

신선종적 운과묘 (神仙踪跡 雲過杳)

신선이 놀닐던 종적은 구름에 지워 아득하고

원객금회 세모유 (遠客襟懷 歲暮幽)

나그네 회포는 해가 저무니 더욱 사뭇치도다

우화문전 무문처 (羽化門前 無問處)

깃 꽂힌 문전에서 물을 곳이 없으니

봉래소식 몽중미 (蓬來消息 夢中迷)

봉래산 신선의 소식은 꿈 속에서 아득하구나.

시를 읊고난 김삿갓은 누각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을 굽어 보았다.
산 그림자가 한폭의 그림자로 시냇물에 어둡게 어른거렸다.

벌써 저녁 나절이 된 것이다.

안변 읍내는 밥짓는 연기가 지붕위로 몽실몽실 피어 올랐다.

김삿갓은 오늘은 어느집 문전을 두드릴까 생각을 하였다가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곳 안변에 이르는 지난 얼마간 주막집 여인과

권오익 사또 덕분에 잘먹고 편하게 잠을잤다.

그러다보니, 불과 며칠사이에 김삿갓은 배부른 흥정이 앞섰다.
게다가 지금 품속에는 권사또의 소개장이 있지 아니한가 ?
안변읍 관아는 읍내 중앙에 있었다.

이제는 잎이 다 떨어졌지만 아름들이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울울히

들어선 곳에 관사가 있었다.

김삿갓은 위문(衛門)에 이르렀다. 수문장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또 나리를 뵈러 왔소이다. 자, 이것을 사또께 전해주시오."
그는 품속에서 소개장을 꺼내어 수문장에게 주었다.

수문장은 봉서를 받아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그가 나타났다.

"이리 따라 오시오."
김삿갓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몇채의 집을 지나자 후원이 나타났다.

연못을 휘둘러 안쪽으로 들어 가자 문선재(文善齊)라는

현판이 붙은 아담한 별채가 나타났다.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두칸 미닫이 문 앞에서 수문장은 고개를 굽신거리며 아뢰었다.

"듭시라 일러라."
방안에서 젊잖은 목소리가 들렸다.

"듭시지요."
수문장의 말에 김삿갓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사또는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고 있다가 김삿갓을 맞이 했다.

"문안드립니다. 사또 ! "
김삿갓은 우선 인사부터 올렸다.

"소개장은 잘 보았소이다.

나는5 권공하고는 막연한 친구 사이지요.

그의 소개로 천하의 문장가와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기쁘기 그지 없소이다."

안변사또는 목소리도 걸걸하고 체격도 우람한 대장부였는데 ,
첫눈에 김삿갓은 그와 의기가 상통할 것 같았다.
"공사가 끝난 해걸음에 , 이렇게 찾아 뵈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원래 나는 놀기를 좋아해서 내 문전에는 시인묵객이 자주 왕래합니다.
더구나 김선비는 내 친구의 소개이니 더욱 반갑소이다.

이왕 오셨으니 마음편히 계십시오."

두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조금씩 친숙해 갔다.
"오늘 안변 구경은 하셨습니까 ? "
"예, 가학루와 표현정 경치를 구경하였습니다."
"시신께서 그곳을 보시고 그냥 내려오시지는 않았겠지요 ? "

은근히 시 솜씨를 보자는 말이었다.
"예, 표현정 저녁 경치가 좋아 스스로 읊조려 보았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김삿갓은 아까 읊조렸던 시를 낭송했다.

"참 좋습니다. 표현정을 두고 많은 시객들이 시를 지었습니다만 ,

김선비 같은 시인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번으로는 어쩐지 서운 합니다. 한수만 더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시란 쓰는 맛과 보는 맛도 무시할 수 없으니 자,

여기에 적어 주십시오."
사또는 지필을 내놓았다.

김삿갓은 한 수가 아니라 열 수라도 사양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필을 들기 무섭게 죽죽 써내려 갔다.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

임정추기만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

산토고윤월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聲斷普雲中 ..

새홍하처거 성단보운중

숲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었으매 ,

글 짓는 나그네의 심사는 덧없이 슬프도다

물길은 멀어 하늘에 닿을 듯 푸르른데 ,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을 받아 붉기도 하여라

산은 동그런 달을 외롭게 내뿜고 ,

강은 멀리서 오는 바람을 함껏 먹음었네

변방에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느냐 ,

구슬픈 소리가 저믄 구름 속에서 들려오누나

"김선비,이런 글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거요 ? 실로 탄복할 일 입니다 ! "
사또는 동그런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기막히다는 표시였다.

"내 숱한 시객을 만났지만 이런 시를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오.

내 친구가 좋은 분을 소개했구려."

시를 아는 사또는 김삿갓의 시풍에 깜빡 반해버렸다.
술상이 나오고 취기가 도도해지자 두 사람은 비록 나이의 차는 있으나

십년지기 처럼 흉 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지자 사또는 정갈한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그리고 내집에 온 것 처럼 불편을 느끼지 말고 지내라고 누누히 당부를 하였다.

다음날 조반은 일찍 들어왔다.

사또는 오전중 공사를 보느라고 자못 바쁜 눈치였다.

김삿갓은 따뜻한 방안에서 홀로 딩굴고 있노라니

세상근심 모두가 사라지는 듯했다.

점심상을 물리고 나니 사또가 몸소 김삿갓 방으로 들어왔다.
"혼자 무료하셨겠구려."
"아닙니다. 사또님 덕분에 세상 편하오이다."

"내 오늘 저녁에는 큰 잔치를 베풀까 하오.

더불어 이 근방에 글 깨나하는 양반들을 초청하여 시회를 겸할까 하니 ,

김선비의 재주를 한번 보이도록 하시오."

글을 짓는 놀음이라면 어찌 김삿갓이 싫다하랴.

덕분에 푸짐히 먹고 놀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한가지 청이 있소이다."
사또는 낮빛을 고쳐가지고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 "
"내게는 자식이 둘, 딸이 셋 있습니다.

큰 딸은 작년에 출가를 하였고 장남은 올해 열 일곱으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지방 향교(鄕校)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지난 달 부터
집으로 돌아와 홀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애가 과거를 볼 때 까지 스승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 사례는 톡톡히 하리다."
김삿갓은 자못 심각해졌다. 과거를 준비하고 있다면

이미 기초를 뛰어 넘어 수준 높은 경서나 문집을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김삿갓이 걱정하는 것은 가르치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쳤다 손 치더라도 따라 공부하는 학동의 수준이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우선이고 , 또한 열심히 공부를 하였더라도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면 선생 노릇을 한 보람을 찾을수 없다

여겼기에 그는 망설였다.

"어떻소이까 ? 바쁜 일정이 아니라면 내 청을 들어주시오."
사또가 재삼 이렇게 말을 하자 비로서 김삿갓이 입을 열었다.
"한낱 떠돌아 다니는 과객을 그토록 생각하시니 고맙습니다.

하오나 소생의 글이 워낙 짧아, 감히 소임을 이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무슨 말씀이시오 ? 하나를 보면 열 을 알수 있다 하였소.

그대의 시를 보고 읽는 순간 ,나는

오늘에서야 내 자식의 큰 선생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였소.

아울러 내 자식이 가히 아둔한 아이가 아니기에 가르치는데도

애를 먹지는 않을게요.

시경(詩經)에 중점을 두어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소.

꼭 부탁을 합니다."
김삿갓은 역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승락을 하였다.

"본인이 천학비재(賤學非才) 이오나 ,

사또님의 지극한 분부가 있어 수락하오니

너무 큰 기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하하하하.. 역시, 그대의 겸사에 말이 지나치군요.

하긴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하였으니

그대의 겸양지사가 평소의 풍모를 보는듯 하오,

그대 같은 스승을 모시게 되어 아들놈도 크게 기뻐할 것이오."
이로부터 사또는 김삿갓을 "김선생님"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