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12) *어쩔 수 없이 떠맡은 훈장 자리.

우현 띵호와 2021. 9. 29. 22:55

방랑시인 김삿갓 (112)
*어쩔 수 없이 떠맡은 훈장 자리.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서당을 떠나 도망치기 위해,

눈을 뜨기가 무섭게 삿갓과 바랑을 찾았다.


어물어물 하다가는 꼼짝 없이 잡혀,

공맹재 훈장을 떠맡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잠자리에 들 때 머리맡에 놓아 두었던

삿갓과 바랑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것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여기에 놓아 두었구먼 ...)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 구석 저구석으로 삿갓과 바랑을

찾고 있노라니까 필봉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선생은 아침부터 무엇을 찾고 계시오 ?" 하고 물으며 빙글빙글 웃고 있다.
"삿갓과 바랑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선생이 치우셨습니까 ?"
김삿갓이 그렇게 묻자 필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선생이 도망칠 눈치가 보이기에,

내가 삿갓과 바랑을 볼모로 붙잡아 놓았소이다. 하하하."
김삿갓은 보기 좋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떠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
그러자 필봉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선생은 올 때는 마음대로 오셨지만,
떠날 때에는 마음대로 떠나시기가 어려울 것이오."
"마음대로 떠나지 못한다면, 나를 감금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오 ? "
"천만에요 ! 선생을 감금하다니요 ? 그게 무슨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시오.

듣자하니 관서지방을 유람삼아 다니신다고는 하나,

특별히 바쁘게 오라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닌것 같고,

가실 곳도 정하지 않은 주유천하를 하시는 모양이니,

우리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시면서

몇 해 동안 나하고 같이 살아가십시다."
김삿갓은 어이가 없었다.

"훈장 경험이 없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둔다고 일이 되겠습니까 ? "
"훈장 자격이 없어도 나처럼이야 없겠소이까.

나는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 고 이미 통고를 해놓았답니다.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모두들 선생한테 인사를 온다는 거예요.

아마 조금 있으면 마를 사람들이 대거 몰려 올 것입니다."

필봉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어느새 몰려 왔는지 문밖에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필봉은 마을 사람들과 미리 짜기라도 했던지,

방문을 열고 마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은 새로 부임해 오신 훈장님을 환영하려고 오셨는가 보구료.
마침 선생이 방안에 계시니 어서들 들어와 인사를 나누시죠."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방안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어 오는데,

그 수효는 무려 열 두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이 사오십대의 학부형이었는데,

개중에는 칠십객 노인도 두 사람이 끼어 있엇다.

그들은 한 사람씩 방안에 들어오는 대로 김삿갓에게

정중한 인사를 올리며 한마디씩을 건네 왔다.

"선생께서 우리 마을의 서당을 맡아 주신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사옵니다."

"저희 집 아이는 그동안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학식이 높은 선생님이 오셨다고 하니,

내일 부터는 서당에 보내기로 하겠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김삿갓은 훈장 감투를 싫어도 뒤집어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흉악스럽게 치밀한 필봉의 술책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었지만,

이제와서 꽁무니를 뺄수가 없는 형편이 된 것 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인사치례를 한다고 씨암탉 한 마리와

계란 두 꾸러미의 선물까지 가지고 왔기에,
훈장에 대한 그들의 예의와 자식 교육에 대한 열의에

김삿갓은 감동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찾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소감까지 말해 버렸다.

"제가 워낙 부족한 사람인지라,

여러분의 소중한 자제들에게 글을 충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매우 염려 스럽습니다.

그러나 필봉 선생의 지도를 받아 가며,

열과 성을 다하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며 말한다.
"저희들은 선생님만 믿고

이제부터는 마음놓고 아이들을 서당에 보내겠습니다."
그 말 중에는 필봉 선생에 대한 비난의 뜻이 암암리에 내포 되어 있었다.
그러자 필봉 선생이 얼른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는 본래 훈장 자격도 없으면서

마지못해 훈장 자리를 떠맡아 왔었던 것이오.

그러기에 양심의 가책이 없지 않아,

그동안 훌륭한 학자님을 훈장으로 모셔 오려고

남모르는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오.

그러다가 이번에 공자님처럼 훌륭한 선생님을 맞아 오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마을에 커다란 경사라고 생각하오.

그동안에는 자격이 없는 내가 훈장 자리를 타고 앉아 있던 관계로,

어떤 분은 아이를 서당에 보내지 않았던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훌륭한 훈장이 오셨으니

모두들 안심하시고 아이들을 공맹재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박수를 보낸다.

그 박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

어찌 보면 필봉 선생이 훈장 자리를 내 놓는데 대한

기쁨의 박수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필봉 선생의 용기있는

고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박수 같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다음날부터 김삿갓은 어쩔 수 없이

훈장 자리를 떠맡게 되고야 말았다.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