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25)* 평양 기생의 숨은 마력.

우현 띵호와 2021. 9. 29. 23:00

방랑시인 김삿갓 (125)
* 평양 기생의 숨은 마력.


나룻배가 강을 건너 언덕에 이르렀다.
김삿갓은 언덕에 올라 앉아,

저물어 가는 산과 강을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강과 산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던 김삿갓은

시장기가 나며 술 생각이 간절해 왔다.
(에라 ! 남들처럼 기생 외도는 못 하나마 술이나 한잔 마시자)

성안으로 들어가니, 밤거리에는 사람들이 번잡하게 오가고 있었다.
구질구질한 뒷골목을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주천"(酒泉)이라는 간판을 내건 술집이 보였다.

(주천 .... ? 이것은 이태백의 시에서 나온 말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술집 주인은 시에 능통한 사람인게로군..)

김삿갓은 주저없이 술집에 들어가니,

주인은 남자가 아니고 60이 다 된 파파 할머니였다.
"나, 술 한잔 주시오. 오늘밤 이 집에서 자고 갈 수도 있겠지요 ?"
"좋도록 하시구려. 방은 하나뿐이지만,

선객(先客)이 있으니까 함께 주무시면 될 거요."

주인 노파가 술상을 가져 오는데,

나이는 60이 다 돼 보이지만 본바탕은 제법 예쁜 얼굴이었다.
(이 노파는 기생 퇴물쯤 되는가 보구나.)
김삿갓은 맘속으로 그렇게 짐작하며,
"주천 -이라는 말은 이태백의 시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런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하고 주인 노파에게 물었다.
"그 이름은 돌아가신 우리 영감님이 지으셨다오."
"술집 이름을 주천이라고 지는 것을 보면,

영감님은 무척 유식했던 모양이죠 ?"
"유식한 것을 아는 손님이야 말로 더 유식하신가 보구려?

안그래요? 호호호..."
하며 주인 노파가 웃으며 말한다.

마침 그때 방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려왔다.
​"방안에 누가 계신가 보구려."
"누구는 누구겠어요. 오늘밤 손님과 동숙할 선객이지요."
"나하고 동숙할 손님이오 ?"
김삿갓은 방안에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선,

술을 혼자 마실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방안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방안에 계시는 형씨! 이리 나오시오.

우리 두 사람은 오늘밤 같이 자야 할 처지이니,

이리 나오셔서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
방안에 있던 손님은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얼른 술청으로 나오며,
"실례하겠소이다." 하며 술상 앞에 마주 앉는다.
나이는 40쯤 되었을까, 무척 우둔해 보이는 시골 사람이었다.
김삿갓은 자기 소개를 하며 술잔을 내밀어 주니 상대방은 술을 먼저 마시고 나서야,

"나는 황해도 옹진에 사는 강 서방이외다." 하고 말한다.
"옹진서 오셨다구요? 노형도 나처럼 평양 구경을 오신 모양이구려! "
강 서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는 구경을 다닐 팔자는 못된다오."
"그럼 평양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나는 옹진에서 염전을 하고 있지요.

평양에는 소금값이 금값이라고 하기에, 장사차 소금 한 배를
싣고 왔다가 쫄딱 망해 지금은 알거지가 되어 버렸다오."
"저런 ! 어쩌다가 그렇게도 엄청난 실패를 하셨소?"

그러자 강서방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장사에 밑진 것은 아니라오. 돈은 주체를 못 할 만큼 엄청나게 벌은걸요."
"아니 그렇다면 그 돈은 어떡하고 왜 알거지가 되었다는 말이요 ?"
"왜는 무슨 놈의 왜겠소. 그놈에 기생 외도에 미쳐 그만,

많던 돈을 몽땅 퍼주고, 결국은 알거지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

"에이 여보시오. 기생 외도가 아무리 좋기로

돈을 그렇게까지 퍼 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형씨는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구료.

평양 기생들은 사람을 어찌나 잘 녹여 대는지,

돈을 있는 대로퍼주고 싶어지던걸요."

"그렇게나 많은 돈을 퍼 주었으면 정도 꽤 많이 들었을 터인데,

그래도 돈이 떨어지니까 상종을 아니 하려 합디까 ?"

"돈 떨어지자 님 떨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소 ?

평양 기생들은 소금 한 배를 몽땅 삼켜 먹고도 세상에나,

"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터란 말이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양천대소를 하였다.
"하하하, 소금을 입으로 먹은 것은 아니니까 짜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지요.

그나저나 돈을 벌러 평양에 왔다가 알거지가 되어서

몹시 후회스러우시겠소이다."
김삿갓이 위로의 말을 들려 주자, 강 서방은 도리질을 하며 말한다.
"알거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기생 외도를 하다가

알거지가 된 것을 후회 하진 않아요."

강 서방이란 사람은 기가막히게도,

대동강에서 만났던 뱃사공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

돈을 몽땅 빼앗기고도 후회하지 않는다니,

평양 기생들의 숨은 마력이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째서 후회를 안 하지요 ?"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평양 기생과의 즐겁던 기억은 영원히 남을 것 이기 때문이지요."
"하하하,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구려.

평양 기생과의 살림이 그렇게도 즐겁습디까 ?"

"즐겁다뿐이겠어요. 끼니 때마다 진수성찬에,

잠자리 기술 또한 정신을 황홀하게 해 주니,

돈은 둘째치고, 눈앞에 황홀함이 뒷 일을 생각하게 하지 않더란 말입니다."

(* 옮긴이 여담(餘談).... 평양에는 기생 외도 못지 않게,

남자 외도 또한, 즐겁던 기억을 영원히 남게하는 전통이 있는 모양이다.

불법이 되었든 합법이 되었든, 평양을 다녀 온 남쪽에

남자와 여자는 도데체 무엇에 홀리고 왔는지?

한번 다녀오게 되면, 정신줄을 놓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이로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하하, 알거지가 되고도 후회가 되지 않을 정도라니, 알 만한 애기요.

그러면 고향에 내려가 부지런히 소금을 만들어설랑,

한 배 또 싣고 와야 하겠구려 ?"
"아닌게아니라, 돈이 되거든 다시 한번 놀러 올 생각이라오."
그 기생이 누구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강 서방은 그 기생에게 어지간히 미친 모양이었다.

"알거지가 되었다면서, 고향에 돌아갈 노자는 가지고 있소 ?"
"내가 돈이 똑 떨어진 것을 알자, 그 기생은 며, 노자만은 주던걸요.

그것만 보아도 평양 기생들은 얼마나 영리한 여자들이예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배를 움켜 잡고 웃었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말이 있다.

수중에 있는 몇천 금을 모두 퍼 준 처지에,

고향에 돌아갈 노자 몇 푼 돌려 받은 것을 다시없는 은혜로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평양 기생들의 수법은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당한 쪽에서 오히려 고맙게 여기고 있으니,

김삿갓으로서는 그저 웃을밖에 없었다.

"대관절 그 기생은 나이를 몇 살이나 먹은 여자요 ?"
김삿갓은 그 기생이 혹시 예전에 들린,

주막 무하향​ 주모의 도망간 딸, 가실(可實)이 아닌가 싶어,

기생의 나이를 물어 보았다.

"내가 좋아했던 기생의 이름은 라 하고

나이는 열아홉 살밖에 안 된 기생이라오.

나이는 어리지만, 시도 잘 짓고, 노래도 잘하고 ...

못하는 게 없어요. 게다가 잠자리 기술은 어찌나
좋던지, 마치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만 같던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