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27) *재혼 못한 죄.

우현 띵호와 2021. 9. 29. 23:00

방랑시인 김삿갓 (127)
*재혼 못한 죄.


김삿갓은 주인 노파의 실력을 알아보고 싶어서 물었다.
"내가 아까 이 집에 들어오다 보니,

책을 읽고 계시던데, 책은 어떤 책이었소 ?"
"혼자 심심하던 차에 이런 책을 읽고 있었다우."
주인 노파는 그렇게 대답하며,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책을 집어다 보인다.

김삿갓은 그 책을 받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책은 여계(女誡)라는 책으로, 여자의 부덕(婦德)과
예의범절에 대해 소상히 적은, 양가집 규수들이 읽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할머니는 60이 다 돼가지고, 아직도 이런 책을 읽고 있단 말입니까 ?"
"이 책이 어떤 책인가를 알고 계신 걸 보니,

손님은 어지간히 유식한 분인가 보네요.

나는 60이 다 되었지만, 그래도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라오."
"아직도 이런 책을 읽고 계신 것을 보니,

나이에 비해서 정신 연령은 무척 젊은가 보군요."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청춘이다)

라는 말이 있잖아요. 호호호..."
주인 노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간드러지게 웃는데,

아직도 남자를 끄는 매력의 색기가 철철 흘러 넘치는 웃음이었다.
"영감님은 언제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
"영감님이 돌아가신 지는 20년이 다 됬다오."
"그렇다면 영감님은 할머니가 40대에 돌아가신 셈이 아니오 ?"
"내가 마흔한 살 때에 돌아가셨다오."
"그래요 ? 나이차가 상당하셨는데,

처녀 총각으로 만나신 것은 아닌가 봅니다?"
김삿갓은 눈 딱 감고 한마디로 물어 보았다.
"네, 처녀 총각으로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영감님이 시를 좋아 하는 유식한 사람이었고

나 역시도 시를 좋아 했고, 열아홉 살에 만나,

20여 년간이나 살림을 같이해 온 우리 부부는 처녀 총각으로 만난

, 여닛 부부와 다름 없이 살아온 걸요."

김삿갓이 주인 노파와 이런 말을 주고 받는 동안,

옹진서 왔다는 강 서방은 "매화"라는 기생 생각이 간절했던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김삿갓은 주인 노파와 술잔을 나눠 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할머니는 지금도 10년은 젊어 보이는데,

영감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새파랗게 젊어 보였을 게 아니오 ?"
"아닌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내 나이로 보지 않는다오."
"그렇다면 홀로 되셨을 때, 주변에서 재혼하라는 사람이 많았겠구려."
"여기저기서 재혼을 신청해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오.

어떤 중신아비는 나보다도 열 살이나 연하인 젊은 신랑감을

천거해 왔던 일도 있었던걸요."

"그런데 어째서 재혼을 아니 하셨소 ?"
"재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영감님이 살아 계실 때 라는 책을 하도 여러번 읽으라고 권했기 때문에,

재혼할 용기는 끝내 내지 못했어요."

"재혼을 못 한 죄는 라는 책에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여자들에게는 그런 책을 함부로 읽힐 게 아니네요,

안그래요 ? 하하하..."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어 보이며, 그런 농담을 하였다.
주인 노파도 어딘지 수긍이 가는 점이 있는지

잠시 명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얼굴을 들며 말한다.

"손님은 무척 유식한 것 같으니,

내가 재혼 문제로 고민하던 심정을 글로 한번 써볼까요 ?"

"좋소이다. 글로 써보시오"
그러자 주인 노파는 재혼 못 한 심정을 시로써 이렇게 써 보이는 것이었다.

육십노과부 六十老寡婦
육십 먹은 늙은 과부가

단거수공규 單居守空閨
빈 방을 홀로 지키오

관송여계시 慣誦女誡詩
여계라는 책을 많이 읽어서

파지임사훈 頗知姙似訓
여자의 도리를 알고 있는 탓이었소.

방인근지가 傍人勤之嫁
이웃에선 시집가기를 권했고

선남안여근 善男顔如槿
얼굴이 꽃 같은 신랑감도 있었지요

백수작축용 白首作春容
나는 흰 머리를 젊게 꾸미자니

영불괴지분 寧不愧脂粉
분 바르기가 부끄러워 시집을 못 갔소.

시를 모두 읽은 김삿갓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주인 노파에게 말했다.

"이 시를 읽어 보면,

할머니는 재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 못 한 것이 아니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용기를 내어 재혼 하는 것이 어떻겠소 ?"
김삿갓은 눈 딱 감고 재혼을 적극적으로 권고해 보았다.

60 노파에게 재혼을 권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말이었다.
그러나 주인 노파는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다 늙은 여자가 이제 와서 남부끄럽게 무슨 재혼이에요 ! "

주인 노파의 대답속에,

은연중 재혼의 뜻이 있다는 의중을 읽은 김삿갓은 내심 놀라면서,

상황을 휘감아치기 위해, 재빨리 술잔을 내밀어 주며,

"자. 한잔 드시오 !

아무리 늙었기로 재혼을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오 ?" 하고 또 한번 부추겨댔다.
주인 노파는 술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말한다.

"허기는 그래요.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지,

남이 대신 살아 주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이지요. 옛날에 어떤 여류 시인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남편을 여의고 지은 시를 읽어 보면,

홀로 산다는 것은 뼈를 깎는 듯이 괴로운 일인가 봅니다."
"어마 ! 그런 시가 있나요 ? 그 시를 한번 들려 주실래요 ?"

"그럽시다그려 ! "
김삿갓은 이라는 시를 아래와 같이 적어 주었다.

평생리한성신병 平生離恨成身病
님 여읜 슬픔이 병이 되어

주불능료약불지 酒不能療藥不治
술로도 못 달래고 약으로도 못 고치오

금리읍여영불수 衾裏泣如永不水
이불 속에서 홀로 우는 차거운 눈물

일야장류인불지 日夜長流人不知
밤낮없이 흐름을 누가 알리오.

주인 노파는 시를 읽어 보고, 새삼 한숨을 지으며 감탄한다.
"이 시는 어쩌면 나의 심정을 이렇게도 절묘하게 말해 주고 있을까? ..."
"그러니까 외롭게 살지 말고,

지금이라도 재혼을 하란 말이오. 내가 중신을 들까요 ?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어요 ? ...."
주인 노파는 김삿갓의 얼굴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윽히 바라 보다가,

"글쎄요 ..... 손님처럼 글을 잘 하는 사람이라야 말이 잘 통하지 않겠어요 ?"
하며 은연중에 김삿갓에게 마음이 있음을 암시해 보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계집에 게걸이 들었기로,

60 노파의 기둥서방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