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28) *"평양 기생은 퇴물이라도 무섭다 !"

우현 띵호와 2021. 9. 29. 23:00

방랑시인 김삿갓 (128)
*"평양 기생은 퇴물이라도 무섭다 !"

그러자 지금까지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던 강 서방이

주인 노파의 말을 듣고 샘이 나는지 불쑥,
"여보시오. 주인 할머니 ! 이왕 재혼을 하려거든 이 손님 대신에 내가 어떻소 ?
나는 아직도 기운이 왕성한 놈이라오."
하고 무뚝뚝한 어조로 씨부려대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강 서방의 말을 지나치긴 했지만 농담으로 알았다.
그러나 주인 노파는 강 서방의 말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손님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하고 술만 마시더니 어느새 취하셨나 보구려.
술은 그만하고, 이젠 방에 들어가 주무시기나 하시오."
하고 은연중에 따돌리는 태도를 보인다.

강 서방은 그 소리가 비위에 거슬렸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리며, 씹어 뱉듯이 말한다.

"잘들 해보슈. 재혼을 하려거든 행동으로 할 일이지.

무슨 놈에 말들이 그렇게도 많소."

어제까지도 애송이 기생과 좋아 지내며 가진 것을 모두 털린

강 서방이 설마 60 먹은 주인 노파에게샘을 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김삿갓은 그의 일거일동이 어디까지나 질투로만 보였다.

질투도 질투지만, 강짜도 보통이 아닌 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려나 강 서방이 화기롭던 분위기를 휘저어 놓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김삿갓도 주인 노파와

단둘이 술을 마시기가 몹시 멋쩍었다.

그리하여 잠시 후에 방으로 들어와 보니,

강 서방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요란스럽게 코를 골고 있었다.

김삿갓도 자리에 눕자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잠 늘어지게 자다가 웬일인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강 서방이 보이질 않았다.
(응 ? 이 사람이 자다 말고 어디를 갔을까 ?)
소피라도 보러 갔으려니 하고 귀를 기울였더니,

주인방에서 해괴망측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란 것이 , 남여간에 교접할 때 나는 소리가 아닌가.
알아보나 마나 강 서방이 자다 말고 안방으로 건너가,

60 노파를 덮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세상에 알 수 없는 것이 남녀 관계로구나 !)

어제까지도 애송이 기생에게 미쳐 돌아가던 강 서방이

설마 60 노파를 덮칠 줄은 몰랐다.

주인 노파는 강 서방을 분명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을 당하고 보니 별로 싫지 않았던지,
노파 자신도 제법 흥겨운 콧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잠시후 강 서방이 건너오자, 김삿갓은 어둠 속에서 강 서방을 놀려댔다.

"밤잠도 못 자고 부역을 치르느라고 수고가 많구려 ! "
강 서방은 약간 어색한 어조로,
"형씨가 마음에 없어 하길래, 내가 대신 부역을 치렀소이다."
하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애송이 기생만 데리고 놀다가, 늙은이를 상대해도 흥이 납디까 ?"
"매화 생각이 간절하지만, 매화는 만날 수가 없기에 홧김에 한

서방질이지만, 따지고 보면 젊었거나 늙었거나 그 맛은 그게 그겁디다."

강 서방은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 누워 만족스러운 자세로 네 활개를 쫙 편다.
"아무튼 형씨 덕택에 내일 아침은 반찬을 잘 얻어먹게 되었소."
김삿갓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놀려대었다.

다음날 아침 조반상이 들어오는데,

김삿갓이 이미 예언한 대로 반찬이 푸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삿갓은 밥상에 마주 앉으며 강 서방을 또 한번 놀려댔다.
"형씨 덕택에 오늘 아침은 내가 생일을 쇠는 셈이오."

강 서방은 씩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가는 정이 있었으니 오는 정도 있어야 할 게 아니오.

주인 늙은이는 형씨에게 마음이 있던 모양이었지만,

형씨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기에, 내가 대행을 했을 뿐이오."

"처녀가 애기를 낳아도 할말이 있다더니,

아무튼 나를 위해 수고해 주셨다니 고맙소이다."

주인 노파는 쑥스러운 탓인지,

두 사람이 밥을 먹는 동안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이윽고 김삿갓이 행장을 차리고 나서며 강 서방에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했다.
"나는 먼저 떠나겠소. 형씨는 며칠 더 묵어서 떠나시오."

마침 그때 주인 노파가 옷을 곱다랗게 차리고 나타나다가

김삿갓에게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어머나 ! 벌써 떠나시려구요 ?"
"나는 모란봉 구경을 가는 길이오."
"모란봉 구경을 가신다구요 ?

뭐니뭐니 해도 경치가 좋기로는 모란봉이 제일이라우."
주인 노파는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참, 모란봉 애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 어릴 때 이름도 이랍니다."​
하고 묻지도 않은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주인 노파가 이라고 잔뜩 치켜 올려놓고 나서,
이라고 말하는 것이 밉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이렇게 비꼬아 주었다.

"나는 평양 구경을 떠날 때, 평양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어 보았는데,

어떤 중국 사람이 모란봉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시를 지었더군요."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 여기 좀 적어 주실래요 ! "

그러면서 주인 노파는 종이와 붓을 갖다 놓았다.
김삿갓은 서슴치 않고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써갈겨 주었다.

문도목단봉 聞道牧丹峯
이름이 모란봉이라 들어 왔건만

목단화사노 牧丹花巳老
모란꽃은 이미 너무도 늙었네

막한봉무화 莫恨峯無花
모란봉에 꽃이 없다 나무라지 마시오

봉명역자호 峯名亦自好
이름만으로도 그런대로 좋은 것을.

남의 시를 빌려 주인 노파의 늦바람을 비꼬아 준 것 이었다.
그러자 주인 노파는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시는 풍류를 모르는 사람의 시로군요.

꽃이 좋다는 것만 알았지 단풍이 더 좋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요. 라는 말이 있지 않아요 ?"

주인 노파의 재치 있는 반격에 김삿갓은 머쓱해졌다.

늙다리 퇴물 ,평양 기생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코침을 한대 맞은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으며

객줏집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인 노파는 김삿갓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평양 구경을 하시다가 오늘 저녁에 또 오실래요 ?"

하고 묻는다.



"나는 워낙에 기러기 넋이 되어서 ... 오게 되면 오고, 못 오게 되면 못 오고 ..."

딱 잘라 거절하기가 민망해서 애매하게 대답해 주니,

"아무래도 좋아요. 돈은 별로 많지 않아 보이니 , 돈 떨어지거든 언제든지 들르세요.

술은 공짜로 대접할게요."

하고 김삿갓이 다시 왔으면 하는 말투다.



"술을 공짜로 먹여 주겠다니 고맙구려."

김삿갓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다가, 문득 평양으로 도망간 무하향 주모의 딸이 생각나서,

"참, 평양에 본명을 가실(可實)이라고 하는 기생이 있을 터인데 그런 기생을 모르시오 ?"

하고 물어 보았다.



"본명만으로는 사람 찾기가 어렵지요.기명(妓名)을 뭐라고 하지요 ?"

"기명은 나도 모르지요. 분명이 이름이 인 것은 틀림없어요."

"평양에 기생이 몇천 명이 있는데, 기명조차 모른다면 사람을 어떻게 찾는다오 ?

나이는 몇 살이나 되지요?"



"나이도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 30은 넘었을 것이오."

"기생 환갑이 20이니까, 30이 넘었다면, 환갑을 지난 지 벌써 10년이나 되는 셈이네요.

그런데 손님은 그 기생과 특별한 관계가 있으신가요 ?"

주인 노파는 ,나이가 60이 넘은 퇴물 기생인 주제에 질투하는 어조로 대꾸한다.

김삿갓은 속으로 기가차 하면서 , 주인 노파에게 적당히 휘감을 쳐버리고 객줏집을 나오며 혀를찼다.

(에구, 평양 기생은 퇴물이라도 무섭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