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53)

우현 띵호와 2021. 9. 29. 23:08

방랑시인 김삿갓 (153)
*두 늙은이가 서로 먼저 죽으라고 한 말은 , 다정한 말이었다.

순천 땅을 벗어난 김삿갓은 정주(定州),선천(宣川) 쪽으로 가보려고

발길을 서쪽으로 돌렸다.

선천은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방어사(防禦使)로 있었던 고을로서 ,

역적 홍경래(洪京來)가 야간 기습을 해오는 바람에,

어이없게 반란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김삿갓의 가문은
졸지에 풍비박산이 난 곳이었다.

때문에 역적의 후손으로 낙인찍혀 ,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은 원천 봉쇄 되었으며,

이런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김삿갓 자신이 조상의 죄를 생각하며 ,

해를 보기가 부끄럽다 여기고 삿갓을 뒤집어 쓰고,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며 유리걸식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선천

 그곳의 사건 때문이 아니던가.

생각해 보면 선천이라는 곳은 김삿갓의 가문과는

악연이 너무도 깊은 곳이다.

그처럼 악연이 깊은 곳이기에,

이번 기회에 선천에는 일부러라도 꼭 한 번 들러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주를 거쳐 선천으로 가는 길에, 산속에서 길이 저물었다.

저녁을 얻어 먹고 잘 만한 곳을 찾느라고 산속을 헤매다 보니,

저 멀리 산속에 조그만 불빛이 하나 보였다.
(옳지, 됐다 ! 저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하자.)

그 집 삽짝문 앞에 이르러 주인을 부르려고 하는 바로 그때,

집안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내외간에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영감이 먼저 죽어요."
"무슨소리 ! 내가 왜 먼저 죽나 ! 임자가 먼저 죽으라고 ! "
"영감이 먼저 죽으래도 그러네요.

영감이 먼저 죽어야 영감 장사를 내가 지내 줄 게 아니예요 ? "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저녁이나 지으라구 ! "
주인 영감은 그렇게 말을 하며 밖으로 나오다가, 사립문 안쪽,

작은 마당에 서 있는 김삿갓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 '
김삿갓은 머리를 정중히 수구려 보이며 말했다.
"저는 지나가던 행객이올시다. 길은 저물고 인가는 없어 부득이

하룻밤 신세를 부탁하러 왔는데,
공교롭게도 내외분께서 다투고 계시는 것 같기에 ......"
주인 영감은 그 소리를 듣고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하하하, 우리 두 늙은이가 서로 먼저 죽으라고 한 말을 싸우는

소리로 알았던 모양이구려 ...
그러나 ,아무 걱정 말고 어서 들어오시구려."
주인 영감은 김삿갓을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더니, 마누라를 소개하면서,
"오늘 저녁에는 손님이 한 분 오셨으니, 저녁밥을 넉넉히 지어요 ! "
하고 말한다.

팔십이 가까워 보이는 노부부였다.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서로 간에 먼저 죽으라고 우겨대었는지,

김삿갓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누라가 저녁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가 버리자,

주인 영감은 호롱불 앞에 마주 앉으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손님은 우리 두 늙은이가 서로간에 먼저 죽으라고 했던 말을 듣고,

우리가 싸우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구려. 허허허 ....

그러나 실상인즉 그런 게 아니었다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소리 없이 웃을밖에 없었다.
"싸우신게 아니라면 어째서 그와 같이 듣기 거북한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
"먼저 죽으라는 말이 듣기에 거북한 말이라구요 ? "
그리고 주인 영감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며,
"우리같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들에게는 는

말은 결코 거북한 말이 아니라오.

오히려 다정한 말이지요."
"먼저 죽으라는 말이 다정한 말씀이라뇨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주인 영감은 너털웃음을 웃어 보이며,

"귀공이 보시다시피, 우리 두 늙은이는 모두가 살아 있는 송장들이오.

그나마 둘이 살다가 하나가 죽고 나면,

남은 사람이 얼마나 외롭고 고적하겠소.

그런 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마누라가 먼저 죽어야만

내 손으로 시체를 꽁꽁 묶어 마누라 장사를 잘 지내 줄 수가 있겠기에

마누라 더러 먼저 죽으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마누라도 나와 똑같은 심정이어서,

내가 먼저 죽어야만 영감 장사를 잘 지내 줄 수 있겠다고 하면서,

나더러 먼저 죽으라고 말한 것이라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 오는 감동을 받았다.
죽음을 눈앞에 바라보는 노부부 중에서 어느 한쪽이 죽고 나면

남아 있는 사람은 뼈를 깎는 듯한 고독함을 느끼게 될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죽기보다도 더 괴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배우자를

그와같은 고통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서로간에 먼저 죽어 달라고

말한 것은 얼마나 갸륵한 부부애인가.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두 분께서 싸우시는 줄만 알았습니다."
"허허허, 송장이나 다름없는 우리에게 무슨 싸울 일이 있겠소이까.

이제는 마누라의 시체를 내 손으로 묻어 주는 일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지요.

그점에서는 마누라도 내 생각과는 별로 다를 것이 없어요."
듣기만 하여도 등골이 써늘해 오는 노 부부의 처량한 인생이었다.
김삿갓은 노부부 둘 만이 생활하는 것으로 보여, 노인에게 물었다.
"두 분 사이에는 아들 딸간에 혈육이 하나도 없으십니까 ?"
그러자, 주인 영감은 아무 대답을 안 하고 한동안 까닭 모를 우수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