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2)<작은 고추가 맵다>

우현 띵호와 2021. 10. 6. 19:21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2)<작은 고추가 맵다>

작고 말랐지만 깡이 있는 지생원

당나귀 고삐를 감나무에 묶었는데

덩치 큰 젊은 선비가 말을 끌고와…

붓장수 지 생원은 환갑이 지났건만 아직도 한달이면

스무날은 손수 붓을 만들고, 열흘은 붓을 팔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겨울이면 강원도 영월로, 정선으로 돌아다니며 족제비, 담비, 수달피를

사냥꾼으로부터 사들였다.

담비 목털로 세필(細筆) 붓을 만들고 족제비 꼬리로 중필 붓을 만들었다.

강원도를 쏘다니고, 만든 붓을 팔려고 이곳저곳을 다닐 때 지 생원의 발이

되고 동무가 되는 것은 당나귀다.

지 생원은 오척 단신에 피골은 상접해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생김새다.

하지만 깡이 있어 남에게 지는 법이 없다.

평소 안면 있는 장돌뱅이가 “지 생원! 나무 잡아, 바람 불어”라고 농을 던지면,

지 생원은 당나귀를 가리키며 “내 친구 등 휘어질까봐 일부러 살을 뺐어.”

킬킬 웃음을 터뜨린다.

사실 덩치 큰 사람은 당나귀 등에 짐은 실어도 타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작고 마른 지 생원은 붓보따리와 함께 자신도 타고 다닌다.

어느 날, 지 생원이 까닥까닥 당나귀를 타고 주막집 사립문 앞에 당도했다.

당나귀에서 팔짝 뛰어내린 지 생원이 담 안의 감나무에 당나귀 고삐를 묶고

여물과 물을 주었다.

그런 뒤 자신은 주막 마당 들마루에 앉아 국밥에 대포 한잔을 시켰다.

바로 그때, 큰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희멀건 젊은이가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말을 타고선 주막 앞에 내렸다.

젊은이는 말고삐를 지 생원 당나귀가 묶인 감나무에 매는 것이 아닌가!

지 생원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보아하니 둘 다 수놈인데 한 나무에 고삐를 매어두면 틀림없이 싸웁니다.

저기 다른 감나무가 있잖소.”

아들뻘밖에 안돼 보이는 젊은 선비는 눈을 아래로 깔면서

칼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게 염려되면 당나귀를 그리 옮겨 매시오.”

지 생원은 어이가 없어 젊은 선비를 쳐다보자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성큼 마루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 생원의 당나귀 덩치를 종지에 비유하자면 젊은 선비의 말은 흡사 사발이다.

그러나 지 생원은 제자리에 앉으면서 젊은 선비에게 경고했다. “후회하지 마시오.

제 당나귀가 비록 덩치는 작아도 한가락하는 놈입니다.”
선비는 코웃음을 쳤다.

“킁- 킁-” 아니나 다를까, 두 놈이 다투기 시작했다.

말이 당나귀의 여물을 빼앗아 먹자 당나귀가 머리를 밀치다가

전광석화처럼 뒤로 돌더니 뒷다리 둘을 동시에 올려

퍽! 말의 주둥이를 박살낸 것이다.

큰 덩치의 말이 쿵! 하고 쓰러져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입에서 거품을 내뿜더니 축 늘어졌다. 숨을 거둔 것이다.

어깨가 떡 벌어진 젊은 선비가 지 생원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허공에 뜬 두 발을 버둥거리던 지 생원이 목이 졸려 캑캑거리면서도

번개처럼 박치기로 젊은 선비의 면상을 들이받고

양발로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선비도 말 옆에 뻗었지만 이승을 하직한 건 아니고,

코가 내려앉고 불알이 퉁퉁 부어올랐다.

지 생원과 젊은 선비가 동헌으로 가 사또 앞에 섰다.

젊은 선비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쏙 빼버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말을 살려내던가 말 값을 쳐주고,

내려앉은 코뼈를 올려주고 퉁퉁 부어오른 고환도

원상태로 돌려놓으라고 지 생원을 다그쳤다.

가만히 듣고 있던 사또가 지 생원에게 물었다.

“젊은 선비의 말이 사실이렷다?”
그러나 지 생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붓장수 지 생원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사또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 생원은 이번에도 사또를 빤히 쳐다볼 뿐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저놈이 벙어리인가?” 사또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젊은 선비가 “어라, 벙어리 행세를 하네. 사또 나으리,

이 영감탱이는 방금 전까지도 말을 했습니다.”

사또가 물었다 “그래 무슨 말을 했는고?”
젊은 선비가 흥분해 대답했다.

“둘 다 수놈인데 한 나무에 매어두면 싸워요.

저기 다른 나무에……라고 분명히 말을 했습니다.”

아뿔싸, 말을 하고 보니 자기 잘못을 제 입으로 밝힌 셈이 됐다.

사또가 고함쳤다. “네 이놈, 백번 네놈의 잘못이렷다.”
그러면서 지 생원에게 물었다. “왜 사또 앞에서 벙어리 행세를 하느냐?”
지 생원이 입을 열었다.

“제 입으로 사실을 말하면 저 위인은 분명히 딱 잡아뗐을 겁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