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1)<우우상박도>

우현 띵호와 2021. 10. 6. 19:2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01)<우우상박도>

그림에 관심 많은 만석꾼 권참사

청나라 화상에게 그림 한점을 어렵게 구하는데…

권 참사는 강경의 만석꾼 부자로,

아흔아홉칸 고래 등 같은 집에 하인·하녀가 스물다섯이다.

대문 밖 황금바다처럼 펼쳐진 가을 들판,

강경평야에 권 참사 논둑을 밟지 않고선 백걸음도 걸을 수 없다.

권 참사는 영악스러운 작은 처남을 집사로 둔 덕분에

집안 살림살이는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그러고선 허구한 날 선비들과 어울리고 환쟁이(화가)들과

화상(畵商·그림장수)들을 만난다.

드넓은 사랑방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이고,

그 뒤로 딸린 객방에는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유숙한다.

권 참사네 집은 잔칫집처럼 손님들이 들끓어 부엌엔 찬모가

여덟이나 되지만 한시도 쉴 틈이 없다.

권 참사는 글을 잘해 선비들과도 곧잘 어울리지만,

글보다 더 관심을 쏟는 건 그림이다.

이름난 환쟁이들을 불러와 한달이고 두달이고 객방에 유숙시키며

열두폭 병풍을 그리게 하며,

조선 팔도의 화상들은 걸작들을 싸들고 권 참사를 앞다퉈 찾아온다.

열두해 전이다. 청나라에서 한 화상이 찾아왔다.

마치 사신 행렬처럼 요란했다. 커다란 상자를 진 말이 앞서고

가마가 뒤따르고 수행원들이 그 뒤를 이었다. 가마에서 내리는 화상은

두루마기에 작은 갓만 쓰고 홀로 찾아오는 우리나라 화상과 달랐다.

황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비단 치파오를 입은, 풍채 좋은 초로의 귀인이었다.

그는 진수성찬에 산삼주를 대접받고 나서야 말등에서 기다란 상자를 내려

자물쇠를 풀었다. 광목 보자기를 풀고 다시 비단 보자기를 푼 다음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펼쳤다.

아하~.”
권 참사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폭이 여섯자요,

길이가 아홉자인 비단 화폭에 뿔을 맞댄 두마리의 황소가 버티고 있었다.

머리는 땅에 닿았고, 땅을 박차는 뒷다리는 근육이 꿈틀거리며

꼬리는 하늘 높이 춤을 췄다.

통역사를 가운데 두고 권 참사와 청나라 화상 사이에 기나긴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보따리를 싸서 돌아가겠다는 청나라 화상을 주저앉히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밀고당기기가 이어졌다.

마침내 문전옥답 쉰마지기 값을 지불하고 권 참사는

‘우우상박도(牛牛相搏圖)’를 손에 넣었다.

벽마다 빼곡하게 그림을 걸어놓은 전시방 열두개 중 가장 큰 방의 그림을

모두 걷어내고 새로 산 우우상박도 한점을 걸었다.

백탄을 가득 넣은 독을 전시방 구석에 둬 습기를 모으고

장마철엔 매일 군불까지 지폈다.

출입문엔 튼튼한 자물통을 채우고,

그것도 미덥지 않아 하인이 밤낮으로 문 앞을 지켰다.

친구들, 지인들, 선비들에게 허리에 찬 열쇠로 자물통을 손수 열고

우우상박도를 보여주는 게 권 참사의 가장 큰 낙이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와~” 감탄을 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장장이를 불러 그림이 걸린 방의 환기창에 쇠창살을 달았다.

그런데 꾀죄죄한 그 녀석이 우우상박도를 보더니 킬킬 웃는 것이 아닌가.

권 참사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한마디했다.

“십이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웃는 사람은 네놈이 처음이다. 무식한 놈!”

그러자 대장장이가 고개를 돌려 바로 대꾸했다.
“참사 어른, 싸우는 소 두마리가 모두 꼬리를 하늘 높이 쳐들고 있잖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십이년 동안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양반들이잖아요,

그들이 소싸움을 봤을 턱이 없지요.”

대장장이는 논 쉰마지기 값을 주고 산

우우상박도를 다시 보더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소는 싸울 때 꼬리를 사타구니에 숨깁니다요.”
권 참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대장장이가 싸움소를 길러 소싸움 판에

돌아다니는 장서방을 불러왔다.

그도 그림을 보더니 크게 웃었다.

문전옥답 오십마지기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불꽃에 춤추다가

순식간에 한줌 재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