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19) <갓장수와 방물장수>
노름판에 끼어든 조생원…
마누라 잡히고 서서방 전대까지…
죽었다던 조생원이 집에 오니…
갓장수 조 생원과 방물장수 서 서방은 항상 붙어다닌다.
처음 발을 들여놓은 마을이라도 고갯마루에서 쓱 내려다보면
어느 어느 집을 찾아가야 할지 한눈에 알아챈다.
기와집이 첫걸음 할 집이요 초가집이라도 넓직한 집이 그 다음이다.
서 서방과 조 생원은 점찍어 둔 집의 대문을 함께 들어선다.
하지만 갓에 탕건·망건·정자관을 짊어진 조 생원은 바깥 사랑채로 가고,
색실·노리개·조개단추·은반지·박가분 등을 가득 채운 방물 고리짝을 맨
서 서방은 안채로 가서 안방마님이나 딸들을 만난다.
둘은 장사수완도 뛰어나 보름 남짓 이 동네 저 마을을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갈 땐 전대가 묵직하다.
세살 위 조 생원은 얌전하고 예쁜 마누라와 토끼 같은 아들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들어가지만 서 서방은 아직 총각에 고향도 멀다.
그래서 조 생원 집으로 따라 들어가 문간방에서 며칠 쉬면서
대처 도매상에 나가 물건을 떼와서 고리짝을 채운다.
조 생원의 아내는 더없이 착해 서 서방을 시동생 대하듯 빨래를 해주고
방청소도 해준다.
서 서방도 깍듯이 형수님으로 대하며 조 생원의 만류에도
밥값과 방값을 두둑히 내놓는다.
서 서방은 방물을 챙기고, 조 생원은 갓을 챙겨 집을 나서면
보름 정도 주막 신세를 지게 된다.
그런데 조 생원에게는 못된 버릇이 하나 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하루 종일 혹사한 다리를 쉬게 하려고
일찍 객방에서 잠을 자는 서 서방과 달리 다른 장돌뱅이들과
구석방에서 골패판을 벌이는 것이다.
어느 날 밤에는 전대를 다 털리고선 그것도 모자라 팔아야 할 갓까지
노름판에 다 넘기고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간 적도 있다.
“형님, 제발 노름 좀 하지 마세요.” 서 서방이 싸울 듯이 말려도
그 버릇을 개 주나. 조 생원은 다시는 안 한다고 해놓고도
서 서방이 잠들면 살짝 나가 노름판에 끼어들었다.
어느 날 초저녁, 조 생원의 끗발이 하늘을 찔러 판돈을 싹 쓸어버렸다.
그런데 이경(밤 9시~11시 사이)이 지나자 딴 돈이 야금야금 나가기 시작했다.
소피를 보러 일어났던 서 서방이 깜짝 놀랐다.
갓보따리가 안 보이고 방물고리도 없어졌다.
그런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조 생원이 들어오며
“여보게 동생, 자네 전대 좀 풀어주게. 우리집과 마누라를 잡히겠네.”
서 서방의 전대는 방물을 판 돈뿐만 아니라 여태껏 모은 돈을
금붙이로 바꿔 차고 다녀서 알짜다.
“형님 미쳤어요?” 둘이서 옥신각신 싸우는데 덩치가 황소만 한 소장수가
들어와 강제로 뺏다시피 서 서방의 전대를 풀어가며
“우선 내 빚부터 갚아!” 하며 조 생원을 몰아붙였다.
이튿날 아침, 조 생원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강가에서 그의 짚신이 발견되었고,
왈패 같은 소장수는 서 서방의 멱살을 잡아
조 생원의 빚을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서 서방은 혼자서 터덜터덜 조 생원 집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흘러 설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조 생원이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밥을 짓던 부인이 까무라쳤다.
안방문을 열고 나오던 서 서방도 얼어붙었다. 조 생원도 털썩 주저앉았다.
아들딸 둘밖에 없었는데 못 보던 어린아이 둘이 마누라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조 생원과 서 서방은 마을 어귀 주막으로 가 말없이 술만 들이켜다가
둘 다 흐느껴 울었다. 허구한 날 술만 마시던 두 사람은
어느 날부터 주막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고선 우수(雨水)에 서 서방이 방물고리짝을 매고 집을 나섰다.
경칩에 서 서방이 집으로 돌아오고,
하루 전 조 생원이 갓보따리를 지고 집을 나섰다가 춘분에 돌아오고,
춘분 하루 전에 서 서방이 집을 나섰다.
그렇게 우수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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