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3) <보쌈>

우현 띵호와 2021. 10. 11. 01:03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3) <보쌈>

청상과부로 수절하던 ‘박실댁’ 어느 날 매파가 찾아오는데…

박실댁은 시집가서 한해도 지나기 전에 덜컥 신랑이 죽어 눈물로 삼년을 보냈다.

또 한숨으로 삼년을 보내고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며 삼년을 보내도

망할 놈의 세월은 굼벵이 귀신을 덮어 썼는지

제 나이 이제야 스물여덟살밖에 되지 않았다. 친정도 양반집이요,

시집도 뼈대 있는 대갓집이라 재혼이란 생각도 못할 처지였다.

더군다나 시아버지가 고을 원님을 구워삶아 육년 전 단옷날

박실댁에게 효부상을 내리고 은비녀와 함께 은장도를 상품으로 안겨버렸다.

박실댁이 시집은 꿈도 꾸지 못하게 족쇄를 채워버린 셈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시어머니가 이승을 하직하자

이듬해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를 따라가 정신없이 삼년상을 치르고 나니

박실댁은 텅 빈 기와집에 혼자 남게 됐다.

어느 날, 매파가 찾아왔다.

시부모가 살아계실 적에는 대문 문지방도 못 넘던 매파가 대청까지 올라왔다.

매파의 중매 보따리 속 남자는 신 진사였다.

서른다섯 홀아비 신 진사는 큰 부자는 아니지만 보릿고개 걱정 없고

글솜씨 좋고 인품 좋고 허우대도 훤칠했다.

박실댁도 장날 어깨너머로 봤던 사람이다.

매파의 얘기를 들었지만 박실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매파는 대문을 나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승낙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십여년 수절을 하고 효부 열녀상까지 탔는 데다

시아버지 탈상한 지 몇달 되지도 않은 마당에 어떻게 덥석 혼담을 받아들이겠는가.

매파는 신 진사 집에도 찾아가 박실댁 자랑을 늘어놓았다.

사실 박실댁은 기생처럼 깐 밤 같은 미인은 아니지만,

기품이 몸에서 배어나오는 우아한 여인이라는 것을 신 진사는 알고 있었다.

신 진사는 가타부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신 진사는 사랑방에 서당을 개설해놓고 있었다.

꼭 강미(서당수업료)를 받으려고 서당을 연 게 아니어서

살림이 쪼들리는 집 학동에게는 보리 한됫박도 받지 않아

서당은 언제나 법석거렸다.

신 진사가 서당을 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인물 됨됨이, 글재주를 살펴봐서 사윗감을 골라잡기 위함이다.

신 진사에게는 열아홉살 난 무남독녀가 있었다.

얼굴도 예쁠뿐더러 사근사근 붙임성도 좋아 머리 굵은 서당 학동들뿐만 아니라

며느릿감으로 탐을 내는 집이 한두집이 아니었다.

박실댁 남동생도 서당 학동이지만 그는 스물세살 노총각으로

훈장님 외동딸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는 멀찌감치 밀려나 있었다.

소아마비를 앓아 절름절름 다리를 저는 데다 얼굴은 핏기 없이 하얗고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외톨이로 떠돌았다.

신 진사 외동딸 연주는 심청이 버금가는 효녀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신 진사가 외동딸을 시집보내려고 그렇게 애쓰고 있건만 자신이 시집갈 생각은

제쳐놓고 낮이나 밤이나 아버지 신 진사를 새장가 보내

새엄마를 모셔오는 궁리뿐이다.

매파가 들락거리며 고개 너머 이웃마을 박실댁이 떠오르자

연주는 아버지가 장가를 가야 자기도 시집갈 준비를 하겠다고 졸라댔다.

연주는 시간만 나면 고개를 넘어가 매파가 가르쳐준 박실댁 집 건너편

솔밭에 숨어 멀리서 박실댁을 보며 생긋이 혼자 웃었다.

매파가 신발이 닳도록 고개를 넘나들고 연주가 거들어도

신 진사와 박실댁은 서로 맘을 드러내지 않고 체면만 앞세웠다

매파가 연주와 이마를 맞댄 끝에 묘안을 짜냈다.

처서가 지나 밤공기가 서늘해지고 풀벌레소리 요란할 제,

머리 굵은 서당 학동 다섯이 도둑떼처럼 고개를 넘어와 박실댁 담장을 넘어

안방으로 쳐들어가 발버둥치는 박실댁을 자루에 넣어 대문 밖으로 냅다 뛰었다.

깜깜한 안방에 박실댁을 꺼내놓자 그녀가 이불을 엎어 쓰고 웅크렸다.

박실댁을 납치(?)해온 학동들은 킬킬대며 물러나고 연주가 들어와

와들와들 떠는 박실댁을 껴안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어머님, 감주 한모금 마시고 가슴을 쓸어내리세요” 하자

어둠 속에서 감주를 마시고 긴 한숨을 쉬었다.

원래 보쌈 첫날밤부터 신랑이 덮치는 법은 없다.

“어머님, 얼마나 놀라셨어요. 제가 옆에서 지킬 테니 푹 주무세요.”

박실댁의 손을 잡아당겨 연주도 속옷차림으로 박실댁 옆에 누웠다.

박실댁의 두손을 꼭 잡고 “어머님, 어머님…” 하던 연주가 깜박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따끔하기도 하고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

깨어난 연주는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머리 굵은 학동들 다섯이 박실댁 안방에 쳐들어가

자루에 넣어온 사람은 박실댁이 아니라 그녀의 친정 남동생, 노총각 절름발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