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4) 귀신이 살고 있다

우현 띵호와 2021. 10. 11. 01:18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4) 귀신이 살고 있다
오 대감네가 숙부 상 치르는 사이
외동아들은 밤중 몰래 빠져나와
잠든 침모의 방문을 두드리는데…

오 대감의 숙부가 상을 당해 9일장을 치르느라 대감집 하녀와 찬모까지도

이십리 밖 상가에서 땀을 흘리고,

넓은 상갓집 이방 저방에 쓰러져 잠들기를 벌써 엿새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날 밤,

오 대감의 열여덟살 외동아들은 도롱이를 쓰고 상가를 빠져나가

이십리 를 걸어 제집으로 갔다. 그 집에는 늙은 행랑아범과 침모뿐이다.

그는 행랑아범을 깨우지 않고 담장 밖 감나무 가지를 잡고 훌쩍 담을 뛰어넘어

곧장 침모 방으로 다가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침모, 급히 상복 하나를 만들어야 쓰겄소. 여기 안동포 한필 가져왔소.”

잠을 자던 침모가 문고리를 벗기자 바람처럼 방으로 들어간 아들은

스물한살 침모를 쓰러뜨렸다.

침모는 필사적으로 속치마 끈을 잡고 행랑아범을 불렀지만 천둥소리가

고함을 뭉개버리고 아들의 손바닥이 입을 막았다.

행랑아범이 천둥소리 낙수소리 사이로 간간이 들리는 자지러지는 비명에 일어나

중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가자 검은 물체가 쏜살같이 비를 가르며 담을 넘어 사라졌다.

행랑아범이 침모방 앞에 가서 침모를 불러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아무 대답도 없다.

“잘못 들었나. 도둑이 안방을 털었나. 설마?” 안방문을 열어봤지만 굳게 잠겨 있다.

오 대감과 식구들이 숙부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외동아들은 사랑방에서 오 대감과 함께 기거하며

과거 준비를 하느라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고, 침모는 자기 방에서 바느질만 했다.

오 대감의 아들은 개차반이 아니다. 수려한 외모에 언행도 조심스러워

오 대감의 기대가 태산 같았다.

석달여 지났을 때, 침모가 헛구역질을 했다.

오 대감의 부인인 안방마님은 깜짝 놀랐다.

스물한살 침모는 막된 처녀가 아니다.

양반 집안에 재산도 탄탄했지만 아버지가 소갈병에 걸려 7년을 병석에 누워

살림을 바닥내고서야 이승을 하직했다.

맏딸 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3년 전에 오 대감댁 침모로 들어왔다.

얌전하고 성실한 침모가 애를 가졌으니 안방마님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침모에게 뱃속 애의 아비를 추궁하자 과거를 준비 하는 외동아들이란 실토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안방마님은 사랑방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안방으로 불러

침모와 동침한 사실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웃으며 “어머님, 제가 그런 짓을 어떻게 하겠 습니까!”

안방마님은 침모를 불러놓고

“네년이 어떤 놈의 씨를 받아 놓고 우리 씨라고 둘러대는 것은

뻐꾸기가 탁란을 하는 꼴이야! 네년이 말한 그날은 우리 애도 상가에서

온종일 일하고 거기서 잔 날이야!”

침모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사실을 밝혀낼 방법이 없었다.

안방마님은 갈림길·암흑길만 만나면 찾아 가는 무당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러자 무당 이 귓속말을 한 뒤 보따리를 안겨줬다.

안방마님은 보따리를 들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돌아 왔다.

침모는 눈물로 밤을 새우다가 상념을 잊는데는 바느질만 한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그날도 삼경이 지나도록 바느질을 하다가 저녁에 먹은 콩죽이 배탈을 일으켜

통시(뒷간)에 갔다가 제 방에 들어 가는데, 흐흐흑 얼어붙었다.

방 안 가운데 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쳐 산발한 귀신 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입에서는 피를 흘리 며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침모는 기절했다.

놀라면 애가 떨어진다는 말처럼 침모는 하혈을 하며 사산 했다.

그녀는 사흘을 누워 있다가 강가로 나가 신발과 버선을 벗어놓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안방마님이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꿈자리가 사나 웠다.

어느 비오는 날 밤, 안방마님이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려고 사군자를 치고 있는데

방문이 스르륵 열리며 산발한 귀신이 들어왔다.

새하얀 얼굴에 입에서는 피를 흘리고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안방마님은 기절해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고 나자 처녀귀신은 사랑방에도 나타났다.

밤새도록 마당에 횃불을 켜고 하인들이 교대로 지키는데도

처녀귀신은 툭하면 통시에도 나타나고 부엌에도 나타났다.

하인과 하녀들이 모두 도망 가고 대궐 같은 집엔 병석에 누운

오 대감과 바짝 바짝 말라가는 외아들, 그리고 늙은 행랑아범만 살고 있었다.

아니, 또 한사람! 늙은 행랑아범방 다락 속에 숨어 행랑아범이

몰래 갖다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밤만 되면 귀신으로 분장하는 침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