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5)<골패

우현 띵호와 2021. 10. 11. 01:3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5)<골패>

천하의 노랑이 황첨지 머슴살러 들어온 억보에게

골패를 가르치더니 점점 내기가 커지는데…


황 첨지는 천하의 노랑이다.
제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자물통을 꽉 채워 땡전 한푼 나오는 법이 없다.
황 첨지는 머슴이 몸이 아파 일하지 않는 날은
치부책에 일일이 적어놨다가 세경을 깎았다.

“첨지 어른, 이틀째 앓아누워 일을 못한 건 맞는데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깝니까요?” 머슴이 물으면
“네놈 때문에 파종이 이틀 늦어져 소출이 많이 줄었어!” 이런 소문이 퍼져
더 이상 황 첨지네 집에 머슴 살겠다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리숙한 젊은이 하나가 제 발로 찾아왔다.
좀 모자란 듯이 항상 비실비실 웃는 ‘억보’라는 청년인데
어깨가 떡 벌어져 일은 잘했다.

비 오는 날은 황 첨지가 약조한 대로 억보가 쉬는 날이다.
억보가 낮잠을 실컷 자고 일어났는데 황 첨지가 억보 방에 들어왔다.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억보야, 너 골패할 줄 아냐?”
“골패라니, 알밤으로 골 때리기 하는 거예요?” 황 첨지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이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

황 첨지는 무슨 꿍꿍이속인지 부지런히 억보에게 골패를 가르쳤고,
억보는 열심히 배웠다. “첨지 어른, 이것 참 재미있네요.
윷보다도 몇배 재미있네. 이히히히.”

황 첨지의 골패 전수는 억보뿐이 아니다.
밤이 되면 안방에서 재취 임포댁을 앉혀놓고 골패를 가르쳤다.
조강지처를 석녀(石女)라며 몇해 전 쫓아내고,
쉰이 넘은 나이에 자기보다 거의 서른살이나 어린 임포댁을
돈을 주고 사온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새 마누라에게 골패를
가르쳐줬으면서도 그녀를 판에 끼워주지는 않았다.

어느 천둥 치고 비 오는 날,
골패판을 두고 억보와 머리를 맞대고 있던 황 첨지가 한숨을 토하며

“내가 졌다. 네놈이 스승을 잡아먹는구나.

요즘 들어 억보가 이기는 일이 부쩍 잦아지자 황 첨지의 시름이 깊어졌다.
어느 날 분을 참지 못한 황 첨지가 “억보야 너무 싱겁다.
조그마하게 내기를 걸자.” “좋아요! 좋아.” 깨엿 몇가락 내기가
청포묵 내기로 커지더니 급기야 엽전이 오가기 시작했다.

가을걷이가 끝나자 억보는 세경을 받았고,
그동안 황 첨지로부터 골패로 딴 돈이 세경의 삼할은 되었다.
또 한해 머슴을 살기로 한 억보는
늦가을부터 황 첨지와 본격적인 노름판을 벌였다.
밤이 깊도록 골패에 빠져 있을라치면 황 첨지의 새 마누라가 생긋이 웃으며
식혜를 들고 와 “개평 좀 뜯읍시다.”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억보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지난 농사철에 틈틈이 따서 모았던 돈이 다 나가고 세경 받은
피 같은 돈이 나가기 시작하자 억보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둘 다 식은땀을 흘리며 판을 점점 키워나갔다.
그때 새 마누라가 인절미와 조청을 들고 들어왔는데
웬일인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시무룩했다.
억보가 힐끗 쳐다봤더니 왼쪽 눈에 멍이 들어 있었다.
닭이 울 때 노름이 파하고 억보가 제 방으로 돌아가 남은 돈을 헤아려봤더니
끗발이 안 오르면 다음날 밤에 전대가 바닥을 드러낼 참이다.

팔깍지를 베개 삼아 한숨을 토하며 누워 있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고 황 첨지의 새 마누라가 들어왔다.
호롱불을 끄더니 억보 곁에 바짝 다가앉아
“전부 사기도박이에요.
새참을 들고 들어간 내가 억보씨의 패를 보고,
서로 짜놓은 신호로 황 첨지에게 알려준 거예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와락 껴안았다.

아랫도리가 흥건해진 황 첨지의 새 마누라는
억보의 힘찬 절구질에 감청이 고함이 되었다.
억보가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자 “골골하는 노랑이는 옷도 안 벗고
쓰러져 하늘이 무너져도 모를 거요.”

두판을 연이어 치르고 나서 “눈의 멍은 왜 들었소?”
“방물장수한테 쌀 두됫박을 퍼주고
박가분 하나 샀다고 내 눈이 밤탱이가 됐어요.”

이튿날 밤, 억보와 황 첨지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또 붙었다.
끗발의 추는 급격히 억보에게로 기울어졌다.

“다 식습니다. 이것 좀 들고 하세요.”
새 마누라가 호박죽을 권해도 본체만체다.

삼경이 깊었을 때 돈이 다 털린 황 첨지가
다락 속의 금덩어리까지 끄집어냈다.
그것마저 털린 황 첨지가 고꾸라져 자다가 해가 중천일 때 일어나
신호를 어긋낸 마누라를 족치려고 그녀를 찾았더니 없어졌다.
억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