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부르카 이야기

우현 띵호와 2021. 8. 23. 00:19

부르카 이야기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부르카 문제는 아마도 아프가니스탄 이야기일 겁니다.

1990년대 탈리반이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정복한 다음,

여자들에게 부르카를 입지 않으면 외출을 금지하는 율법해석을 강제하면서

외부 세계에 여러 차례 보도가 되었지요.

국내 소개된 자료 중에서 이 주제에 대해 꽤 상세히 다루는 책으로는

피터 마스덴의 『탈리반』이 있습니다.

한 장을 '탈리반의 성 정책'에 할당하고 있죠.

그 외 아흐마드 라시드라든가 다른 저자들의 탈리반이나

아프간 관련 자료들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이야기들을 취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배경
1. 결혼 후에 집에서 현모양처로 사는 여성들이 하나의 이상형이긴 했지만,

     그것은 도시 중상류층이상이라든가 시골의 부농 같은

     어느 정도 사는 집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프가니스탄은 매우 가난한 나라라서, 먹고살기 위해 온가족이

    총동원되어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흔했다.

    예를 들어 도시 하류층 여성들은 행상 같은 것을 했고,

    농촌 여성들 같은 경우 대부분 나가서 밭일 등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들판에서 농사일을 하고 가축을 치는데

    부르카 같은 것을 입지는 않는다.

2. 탈리반이 아프간을 정복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전에도,

    부르카는 아프간 여성들이 즐겨 입는 복장 중 하나였다.

    아무도 안 입다가 강요해서 모두가 입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좀 다른 곳에 있었다.

    아프간 기준으로 부르카는 꽤 비싼 옷이었고,

    가난한 집 여성들은 흔히 부르카가 없었다.

    돈 있는 여성들만 입을 수 있는 패션이 흔히 그렇듯이 기회만 있다면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고 싶어한 여성들은 많았다.

3. 부르카는 기본적으로 도시 지역의 패션이었다.

     (앞서 설명한 것 같은 이유로 부르카는 농촌의 일상생활에 부적합한 옷이었다)

     그런데 도시가 발전하고 시장이 생기고,

     도농간 교류가 늘어나면서 시골 여성들이 도시 여성들을 모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동네에선 잘 입지 않아도 읍내 나갈 때는 입어준다든가 하는 식으로

     부르카 착용이 늘어났다. 물론 우선 부르카를 갖고 있어야 말이겠지만.

4. 여기 한 가지 중요한 예외가 있었다.

     아프간 수도 카불은 1950년대에 벌써 미니스커트가 등장하고

     왕비가 머리수건을 벗고 대중들 앞에 등장하는 등,

     다른 아프간 대부분의 지역과는 달리 훨씬 국제적인 취향의 대도시였다.

     따라서 카불의 패션은 시간이 갈수록 서양 스타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 도시들에서도 소수나마 수도의 패션을 모방하고자 하는

     유행에 민감한 여성들이 있었다.

5. 결과적으로 세 그룹의 여성이 있었다.

     1)돈이 없고 바깥일을 해야 하기에 부르카와 별 인연이 없는 저소득층,

     2)부르카를 입을 수 있는 시골과 도시의 중상류층,

     3)서구화 경향을 띤 수도의 교육받은 여성층(상당히 소수임).

    시골에선 부르카 착용이 조금씩 늘어나는 반면,

    도시에선 반대로 조금씩 줄어드는 경향에 있었다.

6. 지역적으로는 북부보다 남부 지역에서 부르카가 더 일반적이었다.

     남부 지역은 탈리반이 속한 파슈툰족의 본거지이다.


탈리반 통치
   이런 상황에서 탈리반이 동남부의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와 아프간을 정복한 다음,

    소위 말하는 복장규제를 발표하고 종교경찰인 선행증진악행방지부와

    탈리반 병사들을 동원해 단속에 나섰다.

7. 탈리반의 정복은 기본적으로 시골 세력이 도시를 정복한 유형의 사건이었다.

     많은 탈리반 병사들은 아프간 - 파키스탄 국경지대의 난민촌 등에서

    자라 종교교육만 받았고, 도시 생활이나 여성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들은 도시는 썩었고 퇴폐적인 문화로 가득차 있다고 배웠고

    또 도시와 조우하여 컬쳐쇼크를 받고는 실제로도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탈리반은 썩은 도시민들에게 소박하고 건전한 (시골) 문화를 가르쳐서

    네놈들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마라는 식의 정책을 펼쳤다.

    반대로 정복당한 아프간 도시민들 입장에서 탈리반은 무식하고

    거칠기만 한 촌뜨기들이었다.

    세계 어딜 가도 도시문화가 시골로 전파되는 것이지 시골문화가 도시로

    전파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법이다.

    탈리반은 문화의 전파를 역류시키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복자와 피정복민 간의 갈등은 도시로 갈수록 커지는 경향이 있었고,

    말을 안들으면 탈리반은 힘으로라도 관철시켰다.

    또 탈리반이 정복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지역들은 한층 더 거친 통치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

    파슈툰족의 본거지 칸다하르보다는 카불이나 이란 국경지역의 도시

   헤라트 같은 곳에서 더 많은 충돌이 보고되곤 했다.

8.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탈리반은 남녀 모두에게 강력한 복장규제를 실시했다,

    여성이 부르카를 입어야 한다면 남성은 수염을 기르고 손질하지 않은 머리에

    터번을 쓰고 살와르 카미즈를 입어야 했다.

    과거 시리아에서 무슬림형제단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 시리아 남성들은

    형제단원으로 지목받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앞다투어 수염을 말끔히 깎고 다닌 적이 있었다.

    탈리반 치하에선 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길거리에서 종교경찰과 병사들의 단속에 걸릴 경우 몽둥이 찜질이 벌어지곤

    했기 때문에 일부 남성들은 수염이 빨리 자라기만 기다리며 외출을 삼가했다.

9. 남자들의 수염은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든 자라지만,

    부르카는 그렇지 않은 법. 많은 여성들이 부르카를 갖고 있지 못한데

    복장단속은 갑자기 실시되었다. 부르카를 입어야 되어 불편한 것도 문제이지만,

    부르카가 없어서 집 밖에 못나가는 상황은 더 큰 문제였다.

    그래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부유한 이웃집에 사람을 보내어 부르카를 빌린 후

    입고 나간다든가 하는 편법들이 종종 사용되었다.

10. 탈리반은 정책실행에 있어서, 사람들의 사정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지키는데 문제가 있는 건 네 사정일 뿐이고 우리는 원칙대로 한다는 것이

      그들의 평소 입장이었다.

     일례로 탈리반은 여학교를 대거 폐쇄했다.

     올바른 이슬람 여성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탈리반이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탈리반 이전 정권인 무자히딘들도 세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이슬람주의자들이었지만, 그래도 소용없었다.

    탈리반은 무자히딘을 썩은 무슬림들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탈리반 식이어야만 했다. 일단 새 교육과정이 준비될 때까지만이라도

    기존 여학교들을 운영하자는 제안은 거부되었다.

    일단 폐쇄부터 하고 새 교육과정이 준비되면 그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복장단속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1. 부르카 착용 강제가 가져온 최대의 문제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심각하게 제약받은 것이다.

      온가족이 모두 나가서 일을 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많은 빈곤층 가정에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엄마가 일을 못하게 되자 애들이 나가서 길에서 물건을 판다든가 구걸을 하는 일이 늘어났다.

     카불이 점령된 후 5만명 이상의 난민이 파키스탄으로 떠났는데,

     대부분은 여성의 수입원이 없어짐으로서 난민으로 전락한 사람들이었다.

    헤라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이란으로 피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심지어는 탈리반이 출범한 파키스탄의 난민촌에서도 귀국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여자도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2. 이처럼 부르카 강제 정책은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활동을 하던

       수도의 취업여성들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도시의 하층 여성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반대로 부르카 착용으로부터 가장 영향을 적게 받은 집단은

      유산계층의 전업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바깥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전업주부였던 것이니까.

      농촌은 향촌자치적인 성격이 강하고 인구밀도상 단속의 손길이 적었기 때문에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다.


     대충 이런 분위기나 전후 맥락 속에서 부르카 착용이 강제되었고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보면 보다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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