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74) 천석꾼 천가지 걱정
민진사와 곡차 친구인 석근스님
천석꾼 부자에 경국지색 부인을 둔 그를 부러워하는데…
석근 스님과 민 진사는 곡차 친구다.
암자에서 나올 때 암자로 들어갈 때 석근 스님은 어김없이
민 진사 집에 들러 술잔을 따르며 고담준론을 나누고 시를 짓고 사군자를 쳤다.
허우대가 훤칠한 민 진사는 천석꾼 부자에 경국지색 부인을 둬
세상에 부러울 게 없지만 한가지 아쉬운 건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석근 스님이 부러워죽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민 진사 어른을 가장 팔자 좋은 분이라 하는데.”
민 진사가 한숨을 길게 토하며 “천석꾼 천가지 걱정,
만석꾼 만가지 걱정이란 말 못 들어봤소?”
석근 스님이 컬컬 웃으며
“그건 배부른 부자들이 쫄쫄 굶는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만들어낸 말이지요.”
술자리가 파해 암자로 올라가는 석근 스님 눈에는 비단치마에 가려졌어도
선명한 민 진사 부인의 수밀도 엉덩이 곡선이 아른거렸다.
“민 진사 그 양반, 무자식이 상팔자란 소리도 못 들어봤나.
곳간 꽉 찼지, 문전옥답이 한눈 가득하지,
밤이면 수밀도 부인을 껴안지, 싫증 나면 저잣거리에 살림 차린 첩집에 가지,
상다리가 휘어지게 산해진미를 먹지….
아이고, 같은 남자로 태어나 내 꼴이 이게 뭔가,
뒈질 놈의 나무아미타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민 진사 부인이 대를 잇겠다고 백일기도를 시작한 곳은
석근 스님이 홀로 있는 청곡암이었다.
민 진사가 부인의 등을 떠밀어 청곡암으로 보냈다.
영검하게도 부인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석근 스님은 두번 다시 민 진사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있고 얼마 후
민 진사가 아파 드러누웠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어느 날 민 진사네 시동이 석근 스님을 모시러 왔다.
일년여 만에 본 민 진사는 반쪽이 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석근 스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집을 부탁하오.” 그것이 유언이 되었다.
3년 후 탈상을 할 때 네살 난 상주는 의젓했고
청곡암 석근 스님은 머리를 길러 상투를 틀었다.
민 진사는 백골이 진토가 됐고 그의 사랑방엔
상투를 올리고 정자관을 쓴 석근이 정좌했다.
석근은 밤마다 그렇게도 그리던 수밀도 부인을 안았다.
네살 난 아들은 갈수록 석근을 닮아갔다.
석근은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자기 허벅지를 꼬집어봤다.
어느 날 밤 부인과 합환을 하고 곯아떨어졌는데 꿈에 민 진사가
“석근 스님, 곡차 한잔 합시다” 하며 호리병을 들고 나타나
석근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어느 날은 곳간 기왓장이 깨져 빗물이 스며들었지만
몇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어 곡식이 반은 썩고 나락은 싹이 났다.
문전옥답 물꼬 싸움으로 노 참봉과 멱살잡이도 했다.
천연두에 걸린 아들이 얼굴을 긁을까봐 두손을 묶고
보름이나 곁을 지키며 잠을 못 잤더니 몸살이 나 자신이 드러누웠다.
부인 돈을 떼먹고 야반도주한 저잣거리 새우젓 장수를 잡으러
삼십리나 따라갔지만 결국 헛걸음했다.
안동포를 사두면 크게 오를 것이란 포목점 허 생원 말을 믿고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다.
열일곱살 찬모가 마당쇠하고 눈이 맞아 도망을 친 후에야
다락 속 전대가 없어진 걸 알았다.
부인이 뜨거운 물을 허벅지에 쏟아 화상을 입어
밤이면 사랑방에서 독수공방 신세가 되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건만 크게 앓더니
소아마비가 되어 일어나지도 못했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3년이 흘렀다.
민 진사의 말이 떠올랐다.
청곡암 지붕엔 깨진 기와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고,
쪽마루는 썩어 여기저기 내려앉았고,
문풍지는 삭아서 바람에 날아갔다.
문에 박아놓았던 녹슨 대못을 뽑는 사람은 석근 스님이다.
정자관, 비단 마고자 다 벗어 던지고
빛 바랜 가사장삼에 머리를 박박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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