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76)행랑아범 아들, 마당쇠 ..
악랄하기로 소문난 부자 노참봉
그에 버금가는 잔인한 둘째 아들
추운 새벽녘에 행랑아범 불러내
찬물을 퍼붓는데…
노 참봉은 만석꾼 부자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를 가는 패악의 화신이다.
그의 악행은 끝이 없다.
장리쌀을 놓아 남의 논밭을 빼앗는 것은 기본이고
반반한 소작인 마누라 겁탈하기,
논 한마지기 떼주고 남의 딸 사와서 노리개 삼기,
고리를 놓았다가 남의 집 가로채기….
한터의 그 넓은 들이 모두 노 참봉 논밭이고
사이사이 박힌 백여호의 세칸 초가집은 하나같이 노 참봉의 소작농이다.
더 큰 문제는 노 참봉 삼남매의 패악질이 제 아비를 뺨친다는 것이다.
큰아들은 머리에 돌이 들어 있어 서당에도 다니지 않고
저잣거리 왈패들과 어울려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다.
한터 사람들은 큰아들을 만나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길옆으로 비켜서지만 타관에서 온 장사치들은 멋모르고 쳐다봤다가
코피가 터지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분을 못 참는 사람들은 고발을 하려고 관아에 가보지만 사또고 이방이고
포졸까지 노 참봉의 돈꾸러미를 안 먹은 사람이 없어 더 분통이 터지고 만다.
열여섯살 둘째 아들은 큰아들과 다르다.
생긴 것도 말쑥하고 머리도 영악스러워 벌써 초시에 합격한 후
과거 준비에 골몰,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우리 둘째는 장원급제해 암행어사가 될 거야.” 노 참봉은 항상 큰소리다.
둘째 아들도 피는 못 속여 잔인함이 몸에 배어 있다가 가끔 겉으로 드러나면
피를 보고야 만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어느날 새벽녘, 공부하러 일어난 둘째 아들이
발로 문짝을 ‘쾅’ 차더니 “행랑아범 게 있느냐?” 소리치며
살을 에는 새벽 공기를 갈랐다.
고뿔이 심하게 든 행랑아범이 문간방에서 기침을 쏟으며 나오자 다시 큰소리.
“내 방 한번 만져봐. 얼음장이야!” 행랑아범이 이경 때 군불을 지펴놓았는데
노 참봉 막내딸이 밤늦게 다림질을 한다고 아궁이를 뒤적여 불이 꺼진 것이다.
행랑아범이 안마당에 꿇어앉자 둘째 아들이 찬물 한바가지를 퍼부었다.
행랑아범의 하나뿐인 피붙이인 열다섯살 마당쇠가 뛰쳐나와 얼음기둥이 된
아버지를 안고 행랑채 방으로 들어갔지만 벌써 동사한 후였다.
마당쇠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대문을 박차고 나가 눈밭을 뛰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행랑아범의 시신은 거적때기로 말아서 뒷산 눈밭에 묻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해는 뜨고 지고 세월은 흘러갔다.
4년이 지난 어느날 밤, 그날도 매서운 한파가 몰아닥쳤다.
한터 들판 끝자락, 나지막이 솟아오른 봉우리에 횃불이 오르고
“와-” 함성이 적막강산을 찢었다. 동학군이 몰려온 것이다.
동학군이 대궐 같은 노 참봉 집으로 들이닥쳤다.
안방 사랑방을 뒤졌지만 아무도 없었다.
늠름한 젊은 대장이 쌀뒤주를 밀치자 비밀 통로가 나왔다.
그 속에 횃불 하나를 던지니 노 참봉을 필두로
온 식구가 줄줄이 나와 마당에 꿇어앉았다.
“비밀 통로를 어떻게 단박에 찾았지?”
동학군 하나가 묻자 젊은 대장이 대답했다. “내가 팠으니까.”
그는 4년 전에 울부짖으며 사라졌던 행랑아범의 외아들 마당쇠였다.
마당쇠는 꿇어앉은 노 참봉 둘째 아들에게 찬물 한바가지를 퍼부었다.
매서운 추위는 그의 몸을 얼음덩어리로 만들고 죽음의 공포는 그를 혼절시켰다.
‘쿵’ 둘째 아들은 쓰러졌다. 노 참봉의 목을 치려는 동학군에게 젊은 대장이 말했다.
“칼을 거둬. 목을 치면 고통이 끝나.”
동학군이 물러난 후 노 참봉은 동학군과의 약속대로 소작인들로부터
빼앗은 땅문서를 모두 돌려주었다.
둘째 아들은 살았지만 머리를 다쳐 반편이 됐고,
노 참봉은 매일 밤 피를 한요강씩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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