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66)

우현 띵호와 2021. 9. 30. 23:08

방랑시인 김삿갓 (166)
*묘향산에서 만난 서산대사의 발자취.

김삿갓은 영변 약산을 돌아 보며,

약산이야 말로 천혜의 명산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또 약산동대는 옛날부터 진달래의 명소로 이름난 곳이다.

진달래꽃이 한창 피어날 때면,

산속을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과 옷색깔이 진달래빛으로 붉게 물들어

,마치 신선이 도원경(桃源境)을 거니는 것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아쉽게도 봄철이 아닌 가을철에 왔기 때문에,

진달래의 절경을 구경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약산성은 이조 태종 11년에 도절제사 (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이

왕명을 받들어 축조한 성으로,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둘레가 이십 리가 넘는 거대한 규모이다.

게다가 성안에는 곳간이 서른네 칸이나 있어,

여러 고을에서 모아들인 조세미(組稅米)를 보관하여

군량(軍糧)으로도 쓰고, 빈민을 먹여 살리는

구휼미(求恤米)로도 써왔던 것이다.

약산성 축조가 완성된 태종 16년에,

당시에 도체찰사(都體察使)였던 황희(黃喜)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하고 청원하자, 임금은 기꺼이 윤허하였다.

그리하여 약산성은 그때부터 북방 수비의 요충지가 되어 온 것이다.
성이 완공되기 이전에는 북방 오랑캐(중국 돼놈 조상놈)들이

수시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약탈을 해왔었다.

그러나 약산성이 완공된 이후로는 감히 침범을 못 해왔으므로,

백성들은 안심하고 성안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오랑캐의 침범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윤덕(崔潤德)이 도절제사로 있을 때에 북방 오랑캐의 두목인

이살만(李撒滿)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약산성으로 쳐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들은 모두 참패를 하여, 결국은 성하에서 머리를 조아려

항복을 한 일도 있었다.

약산성은 이처럼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인지라

백성들은 약산성을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도 난공불락의 대명사로 쓰이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김삿갓은 약산성을 모두 돌아 보고 나서, 발길을 묘향산으로 돌렸다.
묘향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명산의 하나다.

그래서 서산대사가 일찍이 이 세 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 일이 있었다.
금강산은 빼어나고, 한라산은 장엄하고, 묘향산은 빼어나고 장엄하다.>
영변에서 묘향산으로 가려면 첩첩태산을 백삼십 리를 걸어 넘어야 했다.

길은 가도가도 험준하기만 하였다.

산속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태산준령을 걸어 넘으려니,

숨이 가빠 걷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곧 묘향산을 구경할 수 있다는 설레임이 앞선 탓 인지, 가슴은 설레왔다.
그러기에 자기도 모르게 즉흥시 한 수가 읊조려졌다.

平生所願者何求(평생소원자하구)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었던고

每擬妙香山一遊(애의묘향산일유)
묘향산을 한번 구경하는 일이었노라

山疊疊千峰萬인(산첩첩천봉만인)
산은 첩첩 모든 봉우리 한없이 높고

路層層十步九休(노층층십보구휴)
길은 층층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어야 하네.

묘향산에는 보현사(普賢寺)를 비롯하여,

절이 자그마치 삼백육십개나 있었다.

고려 말 이색(李穡)은 그의 기문(記文)에서, 고 하였다.
이렇게 향나무가 많기에, 산의 이름도 이라 불린 것이 아닌가.
묘향산은 산세가 험준하고 가는 곳 마다 사찰이 많아,

어느 산골짜기나 비경(秘境)이 아닌 곳이 없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들려 오는 물소리에 간간이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가 어우러져, 묘향산은인간 세계가 아니라는 느낌조차 들었다.
김삿갓은 묘향산 속으로 들어서며, 우선 보현사부터 구경하기로 하였다.
보현사는 규모가 웅대하기로는 금강산에 장안사(長安寺)나

유점사(楡岾寺)의 유가 아니었다.

법당 하나만도 육백 칸이 넘는 어머어머한 거찰(巨刹)인데,

절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는 수 많은 산봉우리들은 한결같이

웅장하고 숭고하여, 자연 환경만으로도 부처님의 위혁을

무언중에 보여 주고 있었다.
김삿갓은 묘향산을 구경하며, 서산대사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그는 태백산 기슭인 안주(安州)에서 태어나 묘향산 속에서 자랐고,

수도(修道)와 득도(得道) 또한, 묘향산에서 하였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를 라는 칭호로 불러 오고 있는 것이다.

선조대왕 때에 임진왜란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산중에서 수도에 전념하고 있던 서산대사는 결연히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사찰에서 모여든 1700여 명의

젊은 승려들로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이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달려가 모란봉 싸움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때, 평양에 몽진(蒙塵) 중이던 선조대왕은

서산대사에게 이렇게 하문 하였다.

"지금 나라 형편이 이 지경인데,

승려인 그대가 능히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는가 ? "
서산대사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나라가 망하면 불도(佛道)를 어찌 유지할 수가 있으오리까 ?

그러하니 늙고 연약한 승려들은 절에서 부처님을 봉양하게

하는 것이 도리이옵고, 소승은 젊은 승려들과 함께 왜적을 무찌르겠사옵니다."

이때에 서산대사의 나이가 이미 62세였으니,

실로 그의 기개가 얼마나 웅건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서산대사가 승군으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평소에 그를 존경해 오던 젊은 승려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와,

승군의 수효는 오래지 않아 오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에 따라 아군의 사기가 크게 앙양되었음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었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적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아군은 가는 곳마다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게 되었다.

승려의 몸으로 전쟁에 직접 가담하여

커다란 전공을 세운 것은 일찍이 어느나라 불교사에 없는 일이므로,

이는 불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일이다.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 중이던 사명대사와 처영(處英) 스님도

서산대사에 호응하여, 적에게 양면 공격을 퍼부음으로써,

마침내 왜적을 궁지에 몰아 넣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서산대사의 나이는 이미 69세였다.

선조대왕을 한양으로 모시고 올라온 서산대사는 대왕에게,

"신은 이미 너무 늙었으므로,

모든 군무를 사명과 처영에게 맡기고 노승은 묘향산으로 돌아 갈까 합니다."

하고 청원을 하니, 선조대왕은 그의 전공을 크게 치하하며,

서산대사에게 라는 특별 칭호를 내리며, 귀산(歸山)을 허락하였다.

서산대사는 전쟁에 있어서도 전략과 전술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서산대사를

다음과 같은 시로 칭송한 일이 있다.

無意圖功利 (무의도공리)
공리를 생각하지 않고

專心學道禪 (전심학도선)
전심으로 선을 배웠네

令聞王事急 (영문왕사급)
이제 나라가 위급함을 알고

摠攝下山嶺 (총섭하산령)
총섭이 산에서 내려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