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67) *덧없이 지내 온 반생.

우현 띵호와 2021. 9. 30. 23:08

방랑시인 김삿갓 (167)
*덧없이 지내 온 반생.

보현사의 늙은 스님은 김삿갓에게 서산대사의 이야기를 들려 주다가,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만약 임진왜란 때에 서산대사와 같이 위대한 인물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이미 그때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면 불교가 어디 있으며,

우리 겨레가 목숨인들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소이까.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서산대사야말로 우리 겨레가 영원히

우러러 모셔야 할 거룩한 어른이시지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홍경래에게 어이없이 항복한 할아버지의 과거가 불현듯

떠올라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조상의 죄는 자손만대에 이른다는 불교의 섭리가

결코 헛 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김삿갓은 서산대사가 입적하기 직전까지 거처했던

원적암(圓寂菴)에도 들려 보았다.

서산대사는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그 암자에 기거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리고 서산대사는 운명하기 직전에,

아래와 같은 최후의 임종게(臨終偈)를 읊었다.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구름이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북쪽의 계절은 유난히 빠르다.

김삿갓이 희천(熙川)을 지나 강계 땅으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아직 입동절도 아니건만 , 아침저녁으로는 얼음이 얼기 시작하였다.

옷을 솜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계절에 맞춰 꼬박꼬박 옷을 갈아 입을 형편이 못되었다.

당장 추위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입고 있는

옷구멍이나마 자기 손으로 꿰매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김삿갓은 해진 옷을 기워 입으려고 일찌감치 객줏집에 들었다.
그리하여 바늘에 실을 꿰려고 했으나,

바늘귀가 아물거려 좀처럼 실을 꿸 수가 없었다.
(내 눈이 어느새 이렇게도 어두워졌는가 ? )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등잔 앞에서 책을 읽으려고 했을 때에는

눈이 아물거려 자를 분간하기 어렵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이랴, 옷에서 이를 잡으려 했으나,

눈이 어두워서 이를 찾아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생각하면 기가막힌 노릇이고 처량한 신세였다.

김삿갓은 자신의 허망한 인생이 너무도 처량한 기분이 들어,

즉석에서 안혼(眼昏) 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한 수 읊어 갈겼다.

向日貫針絲變索 (향일관침사변색)
별을 보고 실을 꿰도 바늘귀를 모르겠고

挑燈對案魯無魚 (도등대안노무어)
등잔 앞에서 책을 펴도 노와 어를 혼동하네

春前白樹花無數 (춘전백수화무수)
봄도 아닌 마른가지에 꽃이 핀 듯 보이고

霽後靑天雨有餘 (제후청전우유여)
갠 날도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 같구나

揖路小年云誰某 (읍로소년운수모)
길에서 인사하는 아이는 누구인지 모르겠고

探衣老蝨動知渠 (탐의노슬동지거)
옷을 뒤져 보아도 움직여야 이를 아네

可憐南浦垂竿處 (가련남포수간처)
가련타 이 늙은이 낚싯대 드리워도

不見風波浪費躇 (불견풍파양비저)
물결이 보이지 않아 미끼만 빼앗기고 만다.

저녁을 먹은 뒤, 상투를 새로 틀려고 거울을 들여다 보다가,
김삿갓은 자기 머리가 너무도 희어진 데 적이 놀랐다.
(아니, 어느새 내 머리가 이렇게도 반백이 되었단 말인가?)

머리카락을 헤집고 다시 살펴보니,

검은 머리보다도 흰 머리가 훨씬 많아 보였다.
김삿갓은 또다시 처량한 느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리하여 덧없이 지내 온 반생을 회고해 보며,

즉석에서< 백발한>을 한 수 읊었다.

嗟平天地問男兒 (차평천지문남아)
넓고 넓은 천지간에 대장부 사나이야

知我平生者有誰 (지아평생자유수)
내 평생 지낸 일을 뉘라서 알 것인가

萍水三千里浪跡 (평수삼천리랑적)
삼천리 방방곡곡 부평초로 떠돌아서

琴書四十年處詞 (금서사십년처사)
사십 년 긴긴 세월 글과 노래 허사였네.

靑雲難力致非願 (청운난력치비원)
부귀영화 어려워 바라지도 않았으니

白髮惟公道不悲 (백발유공도불비)
나이에서 오는 백발 슬퍼하지 않노라

驚罷還鄕神起坐 (경파환향신기좌)
고향 꿈을 꾸다가 문득 놀라 깨고 나니

三更越島聲南枝 (삼경월도성남지)
한밤중에 우는 소쩍새는 고향 그리워 하노나.

김삿갓은 고향 꿈이나 꾸어 보려고 불을 끄고 잠을 청해 보았다.
그러나 마음이 산란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불을 켜놓고 책을 읽기 시작 하려는데,

문 밖에서 "에헴"하는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주인이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며, 김삿갓에게 말을 건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