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170)

우현 띵호와 2021. 9. 30. 23:09

방랑시인 김삿갓 (170)
*강계의 지세(地勢)와 평안도 사람들의 인성(人性)

강계로 가려면 적유령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고개가 얼마나 높은지, 가도가도

눈 앞에 보이는 길은 올려다 보이기만 하였다.

전국을 천하주유로 편답해 온 김삿갓의 발걸음조차 지치게 만든

적유령 고개, 숨이 턱에 차 오르니, 북쪽으로는 저 멀리 수많은

산으로 둘려싸여 있는 강계군의 광활한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강계고을은 제주도의 세 배나 되는 광활한 지역으로

동쪽은 낭림 산맥, 남쪽은 묘향 산맥, 북쪽은 강남 산맥 등,

세 개의 산맥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나오며 광활한

고원 지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런 강계 고을은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산중왕국(山中王國)>이라는 인상이 절실하였다.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옛날부터 강계 여자들은 미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삼대 색향 중에서도 으뜸가는 고을이라고

일러 오거니와, 미인이 많은 것은 역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덕택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강계는 고구려의 발상지이며,

이곳은 말갈족과 압록강을 경계로 대치 관계에 있어서,

분쟁이 잦은 곳이며 고구려 세력이 왕성했던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압록강 건너, 멀리는 송화강 유역까지 고구려의 세력이 미쳤던 때도 있었다.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바람에,

강계는 일시에 버려진 땅이 되어,
수 백년 동안은 여진족의 지배를 받아 온 <비운의 국토>이기도 하였다.

이씨 조선이 건국한 이후에도 한양에 있는 중앙정부의 힘이

변방인 이곳 강계까지는 쉽게 이르지 못 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리적 환경과 행정력이 낙후되다 보니,

자연히 강계 사람들은 자립과 독자 생존력이 강하게 되었고

이것은 지역 사람들의 인성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 중국 오랑캐와

지역 분쟁에 늘 시달려왔으며 고향을 지키려는 상무(尙武)정신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강했던 것이다.
김삿갓은 적유령 고개를 넘어 강계 읍내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얼마를 걸어가노라니, 맑은 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커다란 강이 나타났다.
"이 강의 이름은 뭐라고 하지요 ?"
지나가는 농부에게 물어 보니,
"이 강은 독로강 이라오. 돼놈 (몽고) 말로는 <뚜루개(禿魯江)>라고 하지요."
"몽고말로 <뚜루개>리는 말은 무슨 소리요 ?"

" 그 옛날 말갈족과 여진족들이 강계를 점령하고 있었을 때,

그놈들이 강계 여인들을 많이 잡아갔지요.

그때 잡아간 조선 여인들을 그 놈들은 <뚜루개>라고 불렀는데

 그때 돼놈들에게 잡혀 이 강을 건너는 많은 조선 여인들의 꼴이

얼마나 비참했던지, 그때부터 이 강 이름을 숫제 <뚜루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거예요."

김삿갓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져 올 지경이었다.
말갈족과 여진족들이 강계 여인들을 얼마나 많이 납치해 갔으면,

조선의 여인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건너 간 강의 이름조차

<뚜루개 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가.

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거나 망하게 되면 백성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타민족의 박해와 멸시를 받게 되는 법이다.
이렇다 보니 강계 사람들은 외세에 적극 대항하는 강렬한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 정부는 강계 사람들의 이와 같은 강렬한 상무 정신에

오히려 공포감이 느껴져,

그때부터는 평안도 사람이라면 일체 관계에 등용하지 않게 되었다.

(서북인 배척 행정)

그러므로 강계 백성들은 중앙 정부의 차별 대우에 대한 불평이

점차 고조되어 후일에 마침내 <홍경래 난>이라는

반란까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를 깃점으로 중앙 정부는 더욱, 평안도 사람들을

일체의 벼슬아치로 등용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청청강 이북의 평안도 땅은 숫제 <소외된 국토>로 생각하며

행정적으로도 거의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평안도 백성들은 무시로 침범해 오는 되놈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몸소 무술을 연마하고
성체도 자신들 힘으로 구축해야만 하였다.

그런 관계로 평양 이북 땅에는

어느 고을에 가나 영변 철옹성과 같은 난공불락의 성체가 없는 곳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네 고향과 가족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무력을 기르고 성을 튼튼히 쌓아

올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실정은 정신적인 개조를 불가피하게 하여,

평안도 백성들은 가문 의식을 일찍부터 버리고,

집단 방위 체제를 삶의 기본 정신으로 삼아 오게 되었다.

그러한 관계로 중앙 정부의 어떠한 권력도 평안도에서는

함부로 간섭 못 하게 되어 버렸다.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을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는

말로 표현하게 된 근거가 바로 그런 점에서 기인됐던 것이다.

이렇게 소외된 지역이다 보니,

평안도에서도 가장 오지인 강계 지방을 중앙 정부에서는

<죄지은 사람들을 정배 보내는 유배지>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조선초 국문학의 거두였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유배지도 강계였고,

성리학의 대가였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정배를 살던 곳도

다른 지방이 아닌 강계였던 것이다.

김삿갓은 역사로 점절된 과거사를 되짚어 보면서 강계 고을에 도착하자

읍네로 들어 가려고 나룻배에 올랐다.

때마침 날은 어두워 오는데 강물이 용용 도도하게 흘러가는

독로강에는 수많은 낚싯배가 떠 있었고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한 와중에 또다른 어느 한편에서는 구성진 뱃노래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부딪치는 파도 소리 잠을 깨우니
들려 오는 노 소리 처량도 하구나
어기야 디여차
어야 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만경 창파에 몸을 실리어
갈매기도 벗을 삼고 싸워만 가누나

어기야 디여차 어야 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