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8)<매형>

우현 띵호와 2021. 10. 11. 02:02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8)<매형>

호의호식하던 천석꾼 유 진사

어느날 탁발승과 맞닥뜨리는데…

유 진사가 점심 수저를 놓고 솟을대문 밖으로 나갔다.

뒷짐을 지고 발아래 펼쳐진 황금 들판을 내려다보니 빙긋이 입이 벌어졌다.
그때 지나가던 한 탁발승이 삿갓을 푹 눌러쓴 채 “쯧쯧쯧, 운세가 정점을 찍었구랴!”
탁발승은 유 진사에게 이끌려 사랑방에 앉았다.

“여봐라, 여기 곡차를 올리렸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몇순배 청주를 돌린 뒤

유 진사가 물었다.
“정점을 찍다니요? 이제는 내려갈 운세요?”

스님은 여전히 삿갓을 눌러쓴 채 “하강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절벽에서 떨어지듯이 급전직하하겠소이다.”

유 진사가 너털웃음을 짓더니 “땡초가 못하는 말이 없네.” 문을 발로 차며

“여봐라, 하인들을 모두 모이도록 하라.”

그러자 탁발승이 삿갓을 올리며 “수염을 기르니 제법 양반티가 나네.”

유 진사가 뒤로 물러앉으며 설설 오줌을 쌌다.

그때, 자지러진 비명이 들리고 탁발승은 사랑방 문을 열고 나가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은장도를 망태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한손에 움켜쥔 피투성이를 누렁이에게 던졌다. 유 진사의 남근이다.

유 진사는 목숨은 건졌지만 양쪽 발목 인대도 잘려 죽는 것만 못했다.

강산이 두번이나 변한다는 이십년하고도 삼년 전.

보부상 마 생원과 강 도치는 주막에서

국밥에 탁배기 두호리병을 마시고 마루에 누웠다.

“인생에서 한번쯤은 큰 결단을 내려야하는 법이여.

이런 기회는 하늘이 내려준 것.

어물거리다 놓쳐버리면 평생 후회하게 돼!”

이튿날 아침, 밤새도록 뒤척이던 강 도치가 이를 깨물며 “매형, 하겠소!”

단호히 말하자 마 생원은 빙긋이 웃으며 손아래 처남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라가 썩어 있어 매관매직이 판을 치던 시절,

경상도 땅 안동의 김 대감은 봉직을 마치고 낙향한 지 삼년 만에

다시 관직을 맡겠다고 나섰다.

탐관오리 시절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서 깊숙이 묻어 두었던 금은보화를 꺼냈다.

다음날 고리짝에 넣어 좌의정에게 보낼 참이다.

촛불 아래서 금송아지·옥팔찌·금괴를 펼쳐놓고 점검하고 있던 그때,

문을 박차고 복면을 한 강도 둘이 들이닥쳤다.

후다닥 고리짝을 옆구리에 낀 마 생원이 번개처럼 뛰어 대문을 열고 나가자

행랑아범과 하인들이 횃불을 밝혔다.

어물거리던 강 도치는 훌쩍 담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놈들을 잡아라!” 김 대감댁 하인들이 따라나섰지만 잡히는 것은 캄캄한 어둠뿐.

강도 둘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강 도치는 50리를 달아나다 산속으로 숨어들어

잠을 자고 어둠이 내리자 또 밤새도록 걸었다.

해뜰 녘에는 충청도 제천 장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선 국밥집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매형과 약속한 소전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한식경, 두식경, 반나절, 한나절이 지나자 강 도치는 걱정에 휩싸였다.

“매형은 잡혔는가봐, 지금쯤 주리를 틀었겠지….”

그러다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혼자 독식하려고 안 나타나는 건가?

그럴 리가, 누님과 사이에 아들이 셋이고 그렇게 금실이 좋았는데….”

강 도치는 밤이 늦도록 소전 느티나무 아래서 기다리다가 다녀갔다는

표시를 남기고 충주로 향했다.

사흘 뒤 충주 장터에 닿아 2차 접선 지역인 나루터 주막에 단봇짐을 풀고

매형을 기다렸지만, 그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달이 났구먼. 잡힌 게 틀림없어.” 탁배기 한잔을 마시고 나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강 도치는 아홉달 만에 고향에 내려갔다.

누님이 그를 잡고 매형의 행방을 물었다.

강 도치가 먼 산만 바라보자 누님이 울음을 터뜨렸다.

“제삿날은 언제로 할꼬?” “죽지 않았어요. 매형은 돌아옵니다.”

목이 메어 말끝을 흐린 강 도치는 장가 밑천으로 모아 뒀던 돈을 누님에게 주고

다시 보부상 길로 나섰다.

그리고 안동 김 대감댁 주위를 기웃거리며 소문을 들었다.

큰 도둑을 맞았지만 도둑은 못 잡았다는 것을!

강 도치는 조선 팔도강산을 헤집고 다녔다.

이문을 찾아 쏘다니는 게 아니라 소문을 잡으러 쏘다녔다.

그렇게 하기를 이십여년. 전라도 땅 벌교에서 늙은 보부상으로부터

매형 소문을 들었다. 성을 바꾸고 진사 벼슬도 샀다.

매형이라는 작자는 천석꾼 부자 유 진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 도치는 탁발승으로 변장해 유 진사를, 아니 매형 마 생원을 처단했다.

그리고 승복을 입은 김에 입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