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9)

우현 띵호와 2021. 10. 11. 02:15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49) 돌암과 춘화
숙경부인이 된 삼패기생 춘화
이진사가 된 푸줏간 돌암이
강원도 영월에서 만났는데…

삼년 전 강원도 영월 땅 아담한 기와집으로 한 부인이

열대여섯 되는 딸 하나와 몸종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이웃과 왕래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기껏해야 명절 전 대목장에 가느라 대문을 나서지만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 민모습을 본 사람 이 없다.

그러나 기품 있는 귀부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궁금증만 더해가, 남편이 귀양을 갔다느니 친정집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다느니 온갖 뜬소문만 난무했다.

딸은 그 어미보다는 동네 출입이 잦았다.

몸종과 함께 들판에 가서 봄나물을 뜯기도 하고 동강 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보기도 했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였다.

두어달 전부터 이 집에 매파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호사가들이 매파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매파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름이 ‘숙경부인’ 이라 는 것과

사군자를 치는 솜씨가 빼어나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매파가 들락거리는 것은 무남독녀의 혼처가 나타 났기 때문이다.

동강 건너 부잣집 이 진사네 둘째 아들과 혼담이 오갔다.

이 진사네도 이곳 영월 토박이가 아니라 칠년 전쯤, 한양에서 이주해온 집안이다.

혼담이 무르익어 상견례 날까지 받았다.

신랑감과 신붓감이 서로 만나보는 것은 양쪽 양반 가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앞으로 사돈이 될 양가 부모 들이 서로 만나기로 했다.

신랑집에서 숙경부인 집으로 가마를 보냈다.

숙경 부인은 가마를 타고 동강을 건너 사돈이 될 이 진사 댁으로 갔다.

스물네칸 우뚝 솟은 기와집에 닿자 안사돈 될 신랑의 어머니가

대문 밖에서 반갑게 맞았다.

머리가 부딪힐 듯이 서로 절을 하고 음식상이 차려 진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바깥사돈이 될 이 진사가 큰 갓을 쓰고 고개 숙여 숙경부인에게 절을 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숙경 부인은 얼어붙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으려다 기둥을 잡고 휘청거리자

안사돈 될 이 진사의 부인이 “사부인,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팔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이 진사도 ‘악’ 소리가 나올 만큼 크게 놀랐지만 숙경부인이 쓰러질 듯

균형을 잃은 모습에 놀란 듯하다가 곧 태연함을 찾았다.

숙경부인이 “어젯밤 뭘 잘못 먹었는지 토사곽란이 일어나더니

오늘 이런 추태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사주단자 보낼 일은 매파 편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숙경부인 은 반식경쯤 앉아 있다가 가마를 타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안방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세상에 이럴 수가! 소를 잡고,

돼지를 잡아 푸줏간을 하던 작자가 이곳에 와서 이 진사라? 양반이 되었네!”

숙경부인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 보고 있노라니

한평생 살아온 일이 실타래처럼 풀렸다.

‘숙경부인은 무슨 놈의 숙경부인이냐. 삼패기생 춘화지.’
춘화가 이팔청춘일 때는 지금 그녀의 딸보다도 더 예뻤다.

권번에서 춤과 노래를 익히고 사군자 치는 법과 시 짓는 법을 배워

명월관으로 들어갔을 때는 장안의 한량들이 춘화를 품에 안으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윤 참판이 기와집을 마련해 머리를 얹어주고,

만석꾼 부자 오 참사의 첩이 되었다가,

비단장수 왕 서방의 첩실이 되고….

가난에 한이 맺혀 예쁜 얼굴과 탱탱한 몸을 팔아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한평생 남자들이 돈 보따리 를 싸들고 춘화의 치마끈을 풀려고

안달일 줄 알았 는데, 서른이 넘어 눈 밑에는 잔주름이 생기고

젖 무덤이 밑으로 처지자 남정네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물간 춘화는 색줏집을 차려 푼돈을 받고 아무에게나 치마를 벗는

삼패기생이 되었다. 그때 소 잡고, 돼지 잡고 푸줏간을 하던 돌암이도 만났다.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숙경부인은 혼자서 술을 마셨다.

“돌암이가 양반, 이 진사가 되었다 이거지. 그래 그래,

삼패기생 춘화는 숙경부인이 되고!”

며칠 후 매파가 건넨 쪽지를 받은 날 밤,

숙경부인은 동강 가 버드나무 아래서 이 진사를 만났다.

“춘화씨, 아니 숙경부인. 우리 둘만 입을 꿰매면 그만이잖소.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혼례를 올립시다.”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글쎄 안 돼요, 안 돼!”
“말 좀 해보시오. 왜 안 되는지!”
“내 딸의 아비가 당신일지도 모른단 말이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