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면도강(無面渡江)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
[없을 무(灬/8) 낯 면(面/0) 건널 도(氵/9) 강 강(氵/3)]
힘이 장사라고 하면 그 대명사라 할
項羽 (항우)를 떠올린다.
중국 秦(진)나라 말기 무장으로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큰 무쇠 솥을 들어 올려 산이라도 뽑는다는
力拔山(역발산)이라 불렸으니 그럴만하다.
명문가 출신으로 秦始皇(진시황) 사후 혼란한 나라를
평정한 뒤 西楚霸王(서초패왕)을 자칭했다.
하지만 통일의 영광은 漢(한)의 劉邦(유방)에 돌아갔다.
주변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하는 길만 고집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도 남았다.
‘항우도 낙상할 적이 있고 소진도 망발할 적이 있다’고
봐주더라도, 결국 ‘항우는 고집으로 망하고
조조는 꾀로 망한다’고 결론 낸다.
항우는 처음 숙부 項梁(항량)과 함께 거사했을 때
江東(강동)의 젊은이 8000여 명이 힘을 합쳐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책사 范增(범증)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고만장하는 동안 점점 韓信(한신), 張良(장량) 등
공신의 계책을 받아들인 유방에 밀리게 됐다.
垓下(해하)에서 벌어진 운명의 승부에서
항우는 楚(초)나라 노래가 들려오는
四面楚歌(사면초가)의 작전에 참패를 당하고 만다.
800여 기병이 야음을 틈타 겨우 포위망을 뚫은 뒤
烏江(오강)에 이르렀을 때는 26명만이 남았다.
항우는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했고 천하의 패권을
쥐기도 한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뒤돌아봤다.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한 것이지 싸움에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며 최후의 분전을 했지만
대세를 돌릴 수는 없었다.
고집불통의 항우도 마지막에는 체면을 생각했다.
유방의 군대가 추격해오자 도선장의 정장이
강을 건너 피신한 뒤 다음을 도모하라고 했다.
항우가 대답한다.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추대한다 할지라도 내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볼 수 있겠소
(縱江東父兄憐而王我 我何面目見之/
종강동부형련이왕아 아하면목견지)?’
그렇게 말한 뒤 스스로 목을 찔렀다.
‘史記(사기)’의 항우본기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강을 건너 고향 젊은이들의 부형을 볼 낯이 없다는
이 말은 何面目見之(하면목견지)라는 성어로도 쓴다.
항우고집의 항우도 실패한 뒤에는
내세울 면목이 없는데 우리사회는 얼굴 두꺼운
사람이 더 출세한다.
법률을 위반하고도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듯이
떳떳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
온갖 미사여구로 좋은 일을 하겠다고 공약하고
선출된 지도자는 마음이 달라진다.
약속을 잘 지켜 신뢰를 쌓아야 체면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