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귀신속(兵貴神速)
군사를 움직이는 데는 신속이 중요하다.
[병사 병(八/5) 귀할 귀(貝/5) 귀신 신(示/5) 빠를 속(辶/7)]
전쟁에 나섰다 하면 승리해야 한다.
아무리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대더라도
패하고 나면 끝이다.
적이 강을 건너 와 진용을 갖출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로 생각한 襄公(양공)은
참패를 당해 宋襄之仁(송양지인)이란 웃음거리로 남았다.
이와는 달리 속임수를 쓰는 것도 부끄러워하거나 싫증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兵不厭詐(병불염사)란 말이 있다.
또 孫子兵法(손자병법)에도 전쟁은 오래 끌어서는 안 되고
속전속결로 승부를 내야 한다며 방법이
졸렬하더라도 빨리 매듭을 짓도록
兵聞拙速(병문졸속)하라고 가르쳤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군사를 지휘할 때
가장 귀히 여겨야 할 것(兵貴)이
귀신같은 빠름(神速)이다.
말할 것도 없이 목숨이 달려 있는데 용병에는
잠시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이 최상이다.
‘三國志(삼국지)’의 魏書(위서)에서 曹操(조조)가
가장 아끼던 참모 郭嘉(곽가, 170~207)가 한말로 나온다.
그는 병법에 밝고 과단성이 있어 정벌에 나설 때마다
뛰어난 계책으로 신망을 받았다.
조조로부터 "오직 곽가만이 나의 뜻을 잘 안다
(唯奉孝爲能知孤意/ 유봉효위능지고의)"란
말을 들을 정도였다. 奉孝(봉효)는 그의 자다.
後漢(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 조조는
명문가 출신 袁紹(원소)를 격파하고 세력을 크게 키웠다.
원소가 분에 못 이겨 분사하자
그의 세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당시 북쪽에는 소수민족의 두목 單于(선우)가
강대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권력을 잃은 원소의 두 아들이 도주하여 선우에
의지해 오자 변경 침략이 잦았다.
조조는 고민 끝에 선우를 소탕하기로 하고
책사 곽가에게 방책을 물었다.
그는 ‘용병은 신속해야 합니다.
천 리 먼 곳을 공격하는데 짐 실은 수레가 많으면
이롭지 못합니다
(兵貴神速 今千里襲人 輜重多 難以趣利/
병귀신속 금천리습인 치중다 난이취리)’라며
경기병을 보내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고 말했다.
조조는 계책을 받아들여 선우를 물리쳤다.
싸움터가 아니라도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는
말이 있듯이 기회가 왔을 때 재빨리 처리해야 한다.
과거 새 정부가 출범했을 때 전광석화처럼
적폐를 도려내 국민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은 것도
시기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는 졸속이 끼면 안 되니
계획이 치밀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