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오리(梧里)같은 정승은 없는가 ?

우현 띵호와 2021. 8. 22. 01:40

오리(梧里)같은 정승은 없는가 ?

대위같은 계급에서 별 두개 소장으로
파격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이순신은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과
'경상 우수영 원균' ​
그리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여기에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내려 왔으니 ...​

예나 지금이나 군대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이순신을 보고 이들이 가만 있었을리가 있었겠는가?

1597년(정유년) 2월 ​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 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 이 열리고,
선조임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하옵니다."하고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선조임금(선조 임금도 속으로는 동조 함)을 압박하고,

심지어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 파격으로 진급을 시키는데
크게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公은 公, 私는 私'라고 하며 ​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를 못했으니,

당시
이순신의 역적누명 상황이 어떠했겠는가를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왜?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의 형의 집행을 못하고 있었는가?
당시에 영의정 겸 도체찰사(국가비상사태 직무 총사령관)인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1547~1634)이
선조임금의 어명으로 임진왜란의 전시상태에서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시상태에서
아무리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라고 외쳐도

'도체찰사인 이원익의 승락 없이는
선조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임금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

"전하께서 전시 중에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못하옵니다."
라는 이원익의 이 말 한마디에 선조 임금도 체념을 하고

드디어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구나!"
라며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문무백관 199명 대 1 즉,
이원익 딱 한 사람만이 반대를 하여
이순신을 살려 낸 것입니다.​

'안민이 첫째이고 나머지는 군더더기일 뿐.'​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받든 공복, ​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자리를 잡게 되는’
소박한, 그러나 비범한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초가집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

세월이 400년이 지났건만
시대만 변했을 뿐 정치권의 행태는
조금도 변한게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음을 알아주는 딱 한사람만 있으면
외롭지가 않은 것이
본래 사내 대장부들의 기질입니다.

그것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통에는 더하지 않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순신이
온갖 시기질투와 모함으로 사형직전까지 간,
그 만고(萬古)의 충신 이순신을 알아보고

199대 1로,
그리고 선조임금까지의 불신으로부터
이순신을 믿어준 오리 이원익의
탁월한 선견지명이 이순신을 살리고

도탄에 빠진 나라의 영토와
백성들의 생명과 조선 사직을 지켜낸

오리 이원익이야 말로
만고(萬古)에 길이 빛나는 충신이요.

나라의 보배 중의 보배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지 않은가.

199명이라는 숫자가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오리 이원익이 나라를
구한것입니다.

한 사람.오직 올바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래도 어찌보면 이순신장군은 행복한 분이었습니다.
​조선 500년의 상징 청백리 오리 이원익 대감이 계셨으니...

오늘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떤가요?
오리(梧里)같은 청백리 대감은 어디에 계신지!
그는 장수하여,
84세의 일기로 거하면서도 모든 자식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나를 위해 부고도 알리지 말고, 사후에 어떠한 사당이나
칭송된 일은 하지 말라, 비석도 세우지 말라"

그래서,
오리 정승이
우리에게 잊혀졌는지도 모릅니다.

세월이 400년이 지났건만
시대만 변했을 뿐 정치권의 행태는 변함이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떤가요.
이원익(五里)같은 청백리 대감은 어디에 계신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생각나게 하는 때입니다.

아마도 산속에서 계실것만 같다.
자식들 역시 부친에 뜻을 이어 가고 있을 것이다

이원익 정승의 유언
선조의 가훈을 받들어 충효로 마음을 세우고

인과 예절로 몸을 가지며, 형제간의 화목을 잃지 말고

사리사욕을 추구하여 남에게 원한을 사지 말라.

*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단지 수의와 연금으로 시신을 싸고,

외관이 있거든 석회를 쓰지 말고

석회가 있거든 외관을 쓰지 말며,

장지를 고르지 말고

선영내의 본래 정한 곳에 입장하도록 하라.

* 초상에서 소상과 담제 이후라도 일체 무당과

불가의 행사를 쓰지말고 삼년 및 기제에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르도록 하라.

* 풍수가의 말은 신빙할 수 없으니 현혹되지 말고,

자손대대로 한 산지에 장사하여 그 처소를 잃지 않도록 하라.

* 시제와 속제의 묘제 재물은 단지 정결히 할뿐

풍성과 사치를 숭상하지 말고 십여 접시에 그치도록 하라.

1630년 11월 21일
아들 의전과 손주 수약에게 이글을 준다.

* 오리 이원익 정승의 좌우명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

* 영남사람들이 이원익과 류성룡을 두고 말했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