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⑺자연의 이치

우현 띵호와 2021. 9. 18. 02:19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⑺자연의 이치

시집가서 1년도 못 채우고
과부돼 친정으로 돌아온 소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데
어느 밤 보쌈당해 사라진 후…

소월의 병은 깊어져만 가고 그 에미 운산댁의 수심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운산댁 속이 터지는 것은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름시름 앓는데도

무슨 병인지 이름조차 모르겠고, 용하다는 의원 다 불러와 온갖 처방 받아

정성 들여 약을 달여 먹여도 차도가 없는 데다, 딸년이란 게 초당의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제 에미하고 얼굴을 맞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소월의 팔자는 시집갈 때부터 틀어졌다.

고을이 떠들썩하게 부잣집 훤칠한 신랑한테 시집가 부러움을 한몸에

받은 것도 잠깐, 일년도 못 채우고 덜컥 신랑이 급사하자 신랑 잡아먹은

것이라고 시집의 눈초리가 싸늘해져 보따리 하나 옆구리에 차고

친정으로 와버렸다. 에미 혼자 살고 있는 드넓은 기와집은 예나 다름없건만

문간방을 차지하고 있는 행랑아범이 낯설었다.

처음에 소월은 초당에 똬리를 틀고 한숨을 쉬다가도 제 에미 상심이 깊어질까 봐

하루에도 몇차례씩 안채에 들러 에미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엄니, 제 팔자가 엄니하고 함께 살라고 정해져 있나 봐요” 하며

운산댁 손을 꼭 잡곤 했다.

남편 죽고 3년 후 탈상 때도 시집 문전에서 쫓겨나 친정으로 돌아와선

뒷마당에서 소복을 벗어 태우고 거울 앞에 앉아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박가분을 칠하고 남색 치마에 분홍 저고리를 입고 장터 나들이도 했다.

그때까지 청상과부 소월이는 생기발랄했고 제 에미 운산댁과는 소곤소곤

얘기도 곧잘 했다.

그러던 소월이 어느 날부터인가 문을 꼭 걸어 잠근 채 제 에미와는 얼굴도

대하지 않고 말문도 닫아버렸다.

음식도 찬모가 초당 마루에 갖다 놓으면 제 방에 들고 가 두어숟갈 깨작거렸고,

나중엔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더니 드디어 드러누워버렸다.

운산댁이 백방으로 온갖 의원을 데려와 갖은 약을 달여 먹여도 소월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소월이 만나는 단 한사람은 방물장수 아줌씨다.

참고 참던 소월이 어느날 방물장수 아줌씨에게

마침내 속 시원히 털어놓은 사연은 이렇다.

지난가을 어느 장날, 장터를 돌다가 집에 돌아온 소월이

지 에미와 이른 저녁을 먹고 쓰러져 자다가 일어난 것은 밤도 깊은 삼경이었다.

잠도 오지 않아 교교한 달빛을 맞으며 안마당에 나왔다가 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갔다.

안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듯 장대비가 쏟아지듯 요란한 방사가 벌어졌다.
소월이 마루에서 내려와 장독대 뒤에 숨었을 때 안방 문이 살짝이 열렸고,

문을 나온 남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마당을 가로질러 행랑방으로 들어갔다.

얘기를 마친 소월은 흐느꼈다.

방물장수 아줌씨가 소월을 껴안고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소월아씨 시집보낼 때 운산댁 나이 서른여섯이었지요.

아씨 아버지 돌아가신 지 15년, 수절하고 살다가 아씨 시집보내고 수절을 접었지요.

행랑채에 기거해서 행랑아범이지 학식 깊은 점잖은 선비요,

여자는 수절이 미덕이 아닙니다. 남녀 합궁은 자연의 이치요,

그걸 한사코 거스르면 병이 난다오.”

방물장수가 초당을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마님, 아씨 병은 제가 고치겠습니다.”
운산댁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며칠 후 밤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운산댁 담을 넘어온 남정네 셋이 초당으로 몰려가

소월을 보쌈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석달이 지난 초여름. 포동포동 제 살을 되찾은 소월이 반듯한

새신랑을 데리고 친정에 왔다.

지 에미 모시 적삼과 치마, 행랑아범 모시 저고리와 바지 한벌씩을 해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