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⑻의적 도적선

우현 띵호와 2021. 9. 18. 02:20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⑻의적 도적선

신출귀몰한 ‘도적선’
부잣집 재물을 훔쳐
가난한 이들 도와줘

장안에는 온통 도적선(盜積善) 얘기뿐이다.

며칠 전에 종로포목 왕거상 집이 털렸고, 어젯밤엔 민대감 집이 털렸다.

오늘 밤엔 누구 집이 털릴까?

이날 이때껏 털린 집은 손가락이 아프도록 꼽고 꼽아도 모자란다.

부잣집과 세도가는 도적선에게 감쪽같이 털리고도

이를 발설하지 않지만 금세 장안에 알려지기 마련이다.

한양 골목길 몇군데에 이렇게 방이 나붙는다.

“소인 적선은 민웅한 대감 집을 털었도다.

열돈이 넘는 금송아지는 무슨 벼슬을 팔아서 받은 것이며

주먹만 한 비취는 누구한테 받은 것인가?”

신출귀몰 도적선은 재물을 훔쳐서 나올 때 꼭 ‘積善(적선)’이라는 글자를 남겼다.

착한 일을 행하라는 꾸지람일 수도 있고, 훔친 재물을 착한 일에 쓰겠다는

약속일 수도 있고, 자신이 다녀갔다는 알림일 수도 있다.

수표교 아래 거지들이 도적선이 던져 준 엽전 보따리로

거지 신세를 면했다는 둥, 어떤 사람은 빚으로 넘어가게 생긴 집을

도적선이 빚을 대신 갚아줘 지켰다는 둥….

소문은 무성했지만 받은 사람도 후환이 두려워 발설하지 않는다.

지난여름 깊은 밤,

남산골 골목길을 빠져나가던 도적선이 허름한 토담집 봉창에서

흐느껴 우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봉창에서 새 나오는 부부간의 얘기를 들어본즉슨,

딸의 혼인날은 다가오는데 돈이 없어 혼수를 장만하지 못하고 있었다.

봉창 속으로 전대를 던져 넣고 도적선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잊어버릴 만하면 도적선의 행각이 드러나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정승이며 대감들은 도적 하나를 못 잡는다고 의금부와

포도청을 들들 볶았다. 포도대장과 의금부 판사는 서로 앙숙이다.

도적선을 잡은 것은 포도청이었다. 의금부가 머쓱해졌다.

마포의 새우젓 거상 집을 털고 ‘積善’이라는 두글자를 남기고 나오던

도적선이 삽살개 떼에 물려 피를 흘리며 달아나다가

포도청 포졸한테 잡힌 것이다.

포도청 감방에 갇힌 도적선은 목이 떨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모두가 잠든 깊은 어느 밤, 교대한 옥리가 감방 안으로 들어와

도적선이 목에 차고 있는 칼을 벗겨주며 “얼른 도망치시오” 하는 게 아닌가.

도적선이 어이가 없어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데 옥리가 말했다.

“작년 여름 남산골 토담집 봉창으로 나으리가 던져준 전대로

딸의 혼인을 무사히 치렀소이다.

그 은혜를….” 도적선이 옥리의 말을 가로챘다.

“내가 도망치면 당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오.

삼경이 넘기 전에 돌아올 터인즉, 바깥 옥문을 잠그지 말고 기다리시오.”

도적선은 이 말을 남기고 감방을 번개처럼 빠져나갔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 돌아온 도적선이

감방 안으로 들어가 목에 칼을 찼다.

그리고 옥리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단단히 일렀다.

“아침이면 난리가 날 것이오.

나는 한발자국도 감방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고 말하시오.”

아니나 다를까 먼동이 트기도 전에 한떼거리가 횃불을 들고 감옥으로 들이닥쳤다.

의금부 판사가 ‘積善’이라 쓰인 종이를 승전 깃발인 양 흔들며 들어오고

그 뒤로 포도대장과 포졸들이 따랐다.

간밤에 감방을 빠져나간 도적선이 의금부 판사 집을 털고

‘積善’이란 두글자를 남기고 감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의금부 판사가 도적선을 보고 고함쳤다. “네놈의 정체를 밝혀라.”
도적선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으리, 소인은 좀도둑으로 도적선의 흉내를 내봤습니다.”

의금부 판사가 보란 듯이 포도대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빨리 진짜 도적선을 잡아 오시라” 하고 핏대를 높였다.

도적선은 곤장 열대를 맞고 감옥에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