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워커 장군(1889-1950) ☆

우현 띵호와 2021. 9. 22. 23:52

워커 장군(1889-1950) ☆

< 그의 전사지를 찾아서 >

1950년 8월 낙동강 전투 ! 사수냐, 죽음이냐 !
금방이라도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북한군의 공세 앞에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였다.

대한민국은 제주도나 서사모아의 어느 섬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때 미 8군 사령관 워커(Walton Harris Walker) 장군은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고 이상 더 물러설 곳도 없다.'고
하며 낙동강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1950년 7월 29일 그가 예하 사단에 하달한

제 8군 사령부의 작전 명령 일부를 소개한다.

"사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더 이상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퇴각할 곳은 없다. . .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대학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 .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만약 우리 중 일부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방어선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잊혀진 전쟁, 잊혀진 영웅에게 우리는 이제 기억해야 할 전쟁,

잊지 말아야 영웅이 워커 장군이다.

그는 1912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세계 1차 대전 때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은성훈장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군단장을 맡아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급파 되었다.

그는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이었으나 전장에 나서면

그의 애칭인 '불독'처럼 집념과 투지가 넘치는 군인이었다.

지프와 경비행기로 최전방을 쉴 새 없이 누비던 그의 집념은

마침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축한 대한민국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아군은 한때 영산, 다부동, 영천, 포항을 동시 돌파 당하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45일간의 사투 끝에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서울 수복을 거쳐 평양 탈환,

압록강까지 북진을 끝까지 지휘한 워커 사령관 !

공산주의 앞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던 대한민국에

희망을 안겨준 구국의 영웅 워커 장군 !

그러나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는 한국전 최전방의 소총 중대장으로 참전,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이 공로로 은성무공훈장을 받게 되었고,

워커 장군은 전방 시찰과 함께 이를 축하하기 위해 가던 중

지금의 서울 도봉동 596-5번지 현장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즉, 이날 오전 10시경 워커 장군 일행이 탑승한 두 대의 지프차가

의정부 근처에 있는 미 제9군단 예하 24사단 전투지휘소를 향해

이동하던 중이었다.

그때 한국군 제6사단 2연대 수송부 정비대 민간 수리공(문관)

박경례(27세,무면허)가 수리를 마친 닷치 쓰리쿼터(4/3톤)의 시험주행을 위해

트럭을 출발시키던 중,

마주오던 워커 중장과 부관, 운전병, 호위병 네 사람이

타고 있던 지프의 측면을 들이받아 지프가 균형을 잃고 전복되었다.

워커는 앞유리창 밖으로 튕겨나가 땅바닥에 부딪치면서 즉사하고 말았다.

사고 운전자는 과실치사로 3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현재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 맞은편 아파트 대로변에

워커 장군전사지(戰死址)라는 초라한 표지석이 놓여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그 어느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실제로 사망한 장소인 도봉동 596-5 번지는 이곳에서

140여 미터 떨어진 이면 도로변 조그마한 2층 상가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위대한 전쟁 영웅의 전사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쓸쓸하다.

바로 옆에 두고도 늦게 찾은 나의 잘못을 꾸짖어본다.

아버지의 유해는 의전부대에 맡기고 바로 전장으로 돌아가 싸우겠다는

아들 샘 워커에게 맥아더는 직접 알링턴 묘지에 가서 안장시키도록 명령했다.

워커 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되었고,

아들 샘 워커 대위는 훗날 미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이 되었다.

아버지를 머나먼 한국 땅에서 잃고도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샘 워커,

참된 군인의 길을 보여준 아버지와 아들, 이들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상이다.

워커 장군이 아들과 함께 했던 6.25 전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곳도 많이 있다.

서울 워커힐 호텔, 서울 워커힐 아파트, 캠프워커, 대구시 남구에 있는

주한 미군 육군 비행장 캠프 워커, 미국 육군이 워커 장군을 기리어 명명한,
M41경전차 워커 불독, 6.25 전쟁 초기 미8군 사령부였던 워커하우스

(부산부경대학교 내),워커 장군 전사지 표지석(서울 도봉동) 등.

워커힐 호텔은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라는 군인을 기리어 지어진 명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워커는 맥아더와 비교하면 철저하게 잊혀진 인물이다.
북한군의 화마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특급 소방수 워커 장군 !
인천상륙작전에 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열세한 병력으로

한쪽이 터지면 다른 쪽의 병력을 빼서 틀어막는 전략을 쓰다보니

특급 소방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나마 방호산이 지휘하던 인민군 6사단이 마산 쪽으로

측면 기습을 시도하는 바람에 이 전략도 무너질 뻔했다.
어렵고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2013년 10월 워커 장군의 손자인 월튼 워커 2세와 샘 워커 2세가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추모비에 헌화했다.

제1회 한미 동맹상 시상식에 할아버지를 대신한 손자들은

워커 장군을 기억하고자 애쓰는 한국인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6.25 전쟁 속에서 꽃피운 혈맹의 기억을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새긴 워커 장군의 추모비.
이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워커 장군 !
그 이름은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 6.25. 70주년을 맞이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