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중국몽은 우리가 목숨 걸고 막아야 할 악몽"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

우현 띵호와 2021. 9. 23. 21:28

"중국몽은 우리가 목숨 걸고 막아야 할 악몽"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

독립문 건립 123주년 기념사 "중국몽, 한미동맹 해체하고

친중 굴종을 전제로 한 신형 조공관계로 돌아가자는 소리"

 

11월 21일 오전 서울 독립문 앞에서는 독립문 건립 12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시민단체인 미래대안행동과 국민노동조합이 주최하고,

나라지킴이고교연합이 후원한 이 행사에는 중국의 대한(對韓)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보수‧진보성향 인사들이 참여 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낸 천영우

(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123년 전 서재필 선생이 영은문과 모화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은

중국에 대한 사대와 굴종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대내외에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한 것”임을 상기시킨 후 “

지금은 중국이 동아시아의 신흥 패권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120여년 전에 일본의 패권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

지상 과제였듯이 앞으로는 중국의 패권적 횡포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이 외교안보정책의 최대 숙제”라고 강조했다.

 

천 이사장은 “중국몽(中國夢)은 한국이 목숨을 걸고 피해야 할 악몽(惡夢)”이라면서

“ 시진핑이 말하는 ‘위대한 중화민족의 꿈’은 중국이 지배하는 동아시아의 질서로

되돌아가자는 꿈이다.

한미동맹을 해체하고 한국의 친중 굴종을 전제로 한

신형 조공관계로 돌아가자는 소리다”라고 비판했다.

천 이사장은 문재인 정권의 사드 관련 3불 합의,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베이징대 연설,

쿼드 훈련 불참, 시진핑 방한에 매달리는 듯한 태도 등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중국의 패권적 횡포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미국과 일본을 활용할 바에는

차라리 중국의 속국으로 돌아가 굴종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는 모화사상과

사대주의의 잔재에서 우리는 정말 자유로울까요? 일본과의 우호와 협력을

논하는 자는 무조건 토착왜구로 매도 하는 분위기를 보면 일본의 흔적이

보인다는 이유로 개화와 발전을 거부한 123년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천영우 이사장의 기념사 전문을 소개한다.

 

오늘 독립문 건립 123주년 기념식을 주최해 주신 미래대안행동 이대순 대표님과

국민노동조합 이희범 위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공사다망하신 가운데서도

이 뜻 깊은 행사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날 독립문이 언제 왜 세워졌는지 모르거나 관심조차 없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독립이라고 하면 당연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만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독립문 바로 뒤에 있는 공원이 항일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던

서대문 형무소자리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에게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독립문은 123년전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재필 선생이 세운 기념물입니다.

 

독립문이 세워졌던 자리에는 원래 중국의 칙사가 무악재를 넘어 오면

조선의 임금이 친히 나와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이 있었습니다.

‘영은문’은 ‘은혜로운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문’이란 뜻이고

‘모화관’은 ‘중국을 사모하는 여관’이란 뜻이죠.

이 근처에 칙사의 숙소인 태평관이 있었는데 칙사를 위한 환영연회는 궁궐에서

개최한 게 아니라 임금이 태평관까지 와서 베풀었습니다.

 

조선의 국왕보다 중국 칙사의 의전서열이 더 높았기 때문에

칙사를 함부로 궁궐에 오라 가라 할 수가 없었고 국왕이 칙사를 찾아와야 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중국 대사가 도착할 때 대통령이 공항에 나가서 영접하고

대사를 접대하러 명동의 관저로 대통령이 찾아가는 식입니다.

 

중국의 사신이 와 있는 동안에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극진한 향응을 베풀고

돌아갈 때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칙사대접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칙사가 한번 다녀갈 때마다 국고의 절반이 날아갈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왕은 세자를 책봉하는데도 중국 천자의 결재가 필요했습니다.

중국의 천자가 차기 임금의 임면권까지 행사한 셈이었으니

이러한 인사권을 무기로 칙사가 얼마나 횡포를 부렸겠습니까?

이런 칙사를 상대로 로비하고 환심을 사는데 국가재정을 탕진했고

조선에 칙사로 다녀간 중국의 관리는 거금을 벌어갔다고 합니다.

 

 

123년전 서재필 선생이 영은문과 모화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은

중국에 대한 사대와 굴종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대내외에 확실히 각인 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서재필선생은 1884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청나라군대의 진압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다가

청일전쟁으로 조선이 청나라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11년전 청나라의 개입으로 좌절된 개화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의식화 운동에

앞장선 위대한 선각자였습니다.

 

서구문명의 세례를 받고 독립협회를 결성한 선각자들은 근대화와 자강을 통해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천금 같은 기회의 창을 열었습니다만 왜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13년만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까요?

나라가 망하는 데는 이유가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나라의 진로를 둘러싼

지도층의 분열,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와 오판,

그리고 국왕의 무능이 합작해서 만든 비극입니다.

 

첫째, 지도층이 분열된 이유는 중국의 정치적 지배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조선의 주류사회는 여전히 중국의 문화적 정신적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분열증세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념전쟁에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주자성리학적 세계관에 함몰된

수구세력에 이길 수 없었습니다.

화이질서(華夷秩序)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던

조선의 위정척사(衞正斥邪)파들에게 중국은 문명이고 선(善)이었고

일본과 서양은 야만과 악(惡)을 대표하는 세력이었습니다.

개화만이 조선이 기사회생할 길이었지만 메이지 일본을 본받자는 발상은

친중 수구세력으로서는 도저히 따라 갈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이단적이고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개화의 원조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조선 주류사회는 거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이 좌절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봅니다.

조선의 위정척사파에 해당하는 일본의 ‘존왕양이(尊王攘夷)파’는

‘서양오랑캐’에 이기는 방법을 서구식 개혁에서 찾고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이 되었는데

조선의 위정척사파는 이렇듯 목숨 걸고 개화를 가로막는 수구세력이 되었습니다.

 

결국 반일 근본주의에 함몰된 나머지 자발적 개화와 자강의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일본의 침탈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한 건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조정과 사대부들이 세상 대세에 너무 어두웠습니다.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의 위협에 가장 민감했지만 영국도 1885년에 거문도를 점령하고

1902년에는 영일동맹을 맺을 만큼 러시아의 남하정책를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미국과 중국도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는 데는 이해관계가 일치했습니다.

그런데 조선만 이러한 세계의 대세에 역행하여 러시아를 한반도에 끌어들이는데 앞장섰습니다.

조선은 일본뿐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우리 편이 되어 줄 만한 강대국들을

모두 적으로 만드는 자해적 외교에 매달린 것입니다.

 

친러시아 정책의 주역이었던 민비가 일본에 살해 당한 후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한 것은

조선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든 결정적 패착이었습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내린 첫 번째 어명은 갑오개혁세력을

역적으로 몰아 효수를 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조선의 자발적 개혁의 희망은 사라지고 일본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몰아낼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한 을사늑약을 강요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만한 나라들을

모조리 돌아서게 만든 외교실패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겨 동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된 일본과 싸워서

우리가 이길 힘도 없었지만 친러 정책이 일본의 조선 침탈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립무원을 자초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끝으로, 조선이 실존적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의 군주는 너무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우유부단 했습니다.

고종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를 박해하고 망국을 자초한 우매한 군주였습니다.

27명의 조선 왕들 가운데 무능의 챔피언을 뽑으라면 임진왜란 때의 선조,

병자호란 때의 인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고종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겠지만

저는 고종에게 한표 던지는 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독립문이 건립 된지 123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떤가요?

123년 전에 비해 국가 지도층은 더 현명해지고

국제적 대세는 더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반일 근본주의와 친중 사대주의의 망령은 오히려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위협은 항상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세력에서 왔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이 터질 때까지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는 일본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지금은 중국이 동아시아의 신흥 패권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패권세력과 가급적 정면 충돌을 피하고 속국이 되거나

굴종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20여년전에 일본의 패권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 지상 과제였듯이

앞으로는 중국의 패권적 횡포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이 외교안보정책의 최대 숙제입니다.

 

120여년전에는 한반도에 영토적 야심이 없는 역외 강대국과 동맹을 통해

패권세력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옵션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미국과의 동맹으로 주변 강대국의 위협과 침탈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새로운 길이 생겼습니다.

중국에 굴종하지 않고 당당히 중국의 압박과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세상을 만났는데도 한미동맹을 활용할 생각을 못하고 굴종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3년전 한.중간에 ‘사드 3불합의’라는 것을 타결한 바 있습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5천만국민의 안위를 지킬 대한민국의 안보주권을

중국과의 흥정 대상으로 삼고 우리의 자위권을 제한당한 굴욕적인 합의였습니다.

중국의 경제보복을 무마하려고 한미동맹의 근간을 훼손한 것입니다.

3년전 당시 주중 한국대사가 시진핑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후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문구를 썼다는 게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만절필동은 재조지은(再造之恩)과 함께 선조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에 감사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표현인데

이게 북한의 주중 대사가 아니라 주중 대한민국 대사가 썼다는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한국을 작은 나라로 묘사하면서 대한민국을 소한민국으로 폄하하고

중국몽에 한국도 함께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국몽은 한국이 목숨을 걸고 피해야 할 악몽입니다.

시진핑이 말하는 ‘위대한 중화민족의 꿈’은

중국이 지배하는 동아시아의 질서로 되돌아가자는 꿈입니다.

한미동맹을 해체하고 한국의 친중 굴종을 전제로 한

신형 조공관계로 돌아가자는 소리입니다.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이 제기하는 안보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미국, 일본, 인도, 호주간 4개국 협의체인 Quad에도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참가를 거부하면서 시진핑의 방한에 애타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독립문을 세운지 123년이 지났는데도 중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괜히 주눅이 들고, 중국에 당당하게 할말 하는 것을

불경스러운 일로 여기는 자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40년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것은

뼈에 사무친 치욕으로 남아있는데 중국의 속국으로 5백년을

지낸 것은 억울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속국 중에서도 중국을 잘 섬기는데 타의 모범이 된다는 의미로

중국이 조선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게 조선에게 얼마나 모욕적인 표현인줄 모르고

중국의 칭찬으로 여기는 얼빠진 사람들도 아직 있습니다.

 

중국의 패권적 횡포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미국과 일본을 활용할 바에는

차라리 중국의 속국으로 돌아가 굴종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는 모화사상과

사대주의의 잔재에서 우리는 정말 자유로울까요?

일본과의 우호와 협력을 논하는 자는 무조건 토착왜구로 매도 하는 분위기를 보면

일본의 흔적이 보인다는 이유로 개화와 발전을 거부한 123년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영은문과 모화관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 선생이 친중 사대주의의 망령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고민할 화두를 던져 보는 것으로 제 기념사를 갈음합니다.

21세기 親中 사대주의가 더 치욕적인 이유

 

문재인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고

유례없는 난맥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사면초가에 몰려 있고

세계 12위 경제 대국의 국제적 존재감은 사라졌다.

 

중국과는 사드 배치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려다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주권 국가의 기본권을 제한당하는

'3불 합의'의 치욕을 자초했고,

이러한 중국의 패권적 횡포에 맞서기 위해 손잡고 공조해도

모자랄 일본과는 명분도 실리도 승산도 없는 싸움에 함몰되어 있다.

한·미 동맹은 불통과 불신으로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국민이 평화의 환상에 도취해 있는 동안

북한은 평화 파괴 능력을 증강하는 데 어느 때보다 광적으로 매달려 왔다.

이런 북한을 위해 제재를 해제 못 해 안달하고 남북 군사 합의서로

북한군의 동향에 대한 감시 정찰까지 포기했는데도

북한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노골적 능멸과 조롱으로 보답하고 있다.

한때 G20 정상회의와 핵 안보 정상회의를 주최한 나라의

국제적 위상과 발언권은 흔적도 찾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가 이 지경으로 추락하게 된 원인은 많지만

위협 인식(threat perception) 오류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위협 인식이란 우리의 생존과 안위에 대한 위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인식'하는 것인데

여기에 오류가 생기면 적과 동지를 혼동하고 경계할 나라와 공을 들여야 할

나라를 분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외교 안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실제적 위협이 아니라 위협 인식이다.

그 때문에 실존하는 위협과 인식하는 위협 간 괴리가 커지는 만큼

정책은 안보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방향으로 결정된다.

 

우리에 대한 당장의 실존적 위협은 북한에서 오지만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로 시야를 넓혀 보면 역사적으로 우리의 자주독립을 유린한 세력은

예외 없이 역내 신흥 패권 국가였다. 히데요시의 일본, 홍타이지의 청나라,

메이지 일본이 조선을 침탈한 것은 그들이 당시 패권을 장악하는 데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조선이 혼자서 이에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동아시아 패권국은 중국이고 21세기 중에 일본이 패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안보 이해관계는 구조적으로 중국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고

일본과는 일치한다는 의미다.

 

중국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 친중 굴종을 추구하는 것은

메이지 시대에 친일을 선택하는 것과

대세 편승(bandwagon)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하나는 조선이 개방과 개화의 길로 나가는 데 메이지 일본에서는 배울 것이 있었다면

현대 중국에서는 본받을 것이 없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제는 동맹이라는 든든한 보험이 있고 중국의 패권에 위협을 느끼는

다른 국가들과 손잡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에 영토적 야심이 없는

역외 강대국과의 동맹이 불가능한 시대에는 역내 패권 세력의 속국이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대안이 있다.

21세기 친중 사대주의가 지난 세기의 친일보다 더 치욕적인 이유다.

 

그럼에도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이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일본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실존하는 중국의 위협을 직시할 능력을 마비시키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중국의 현실적 위협보다 우리의 인식 속에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침탈이 남긴 트라우마가 여전히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여기에 조선시대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잔재가 반일 감정을 부채질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의 유령이 위협 인식을 결정하도록 방치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을 버리지 못하면 과거가 미래를 가로막고

국민 정서가 국익을 지배하는 해악을 막을 수 없고 우리의 외교 안보 정책은 바로 설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 초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도

잘못된 위협 인식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말로는 비핵화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비핵화를 저해할 정책에 매달리고 있다.

정부가 평화 경제란 이름으로 제재를 허물고 경협을 재개하여

북한 경제에 숨통을 열어줄수록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고

비핵화를 거부할 체력만 키워준다는 단순한 이치를 모를 리 없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위협이 북한의 핵무장이 아니라

이를 되돌리려는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에서 온다는 주사파의 위협 인식 오류가

결국 대북 정책을 왜곡하고 한·미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가는 근본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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