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조선 왕조의 야담과 실화-폐비 윤씨와 장희빈

우현 띵호와 2021. 9. 25. 23:04

조선 왕조의 야담과 실화-폐비 윤씨와 장희빈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 중에

혼동되기 쉬운 사건이 몇 개 있다.

특히 왕비와 후궁의 암투, 시어머니의 모함,

왕자의 난 등이 그렇다.

예를 들면,

육씨와 박씨가 싸운 육박전이 아니라 왕과 왕비가

싸운 육박전으로 1479년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

페비가 된 윤씨는 성종의 왕비였고,

인수대비의 모함으로 1482년 사약을 마셨다.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어머니 윤비의 원수를 갚았다.

장희빈은 숙종 때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걸려서

1701년 사약을 마셨으니까 219년 뒤. 병약했던

장희빈 아들 경종(1688~1724)은 1720년에 왕에 올라

4년간 재위했으나 어머니 장희빈의 복수를 하지 않았다.

 

선조 때 임해군, 광해군, 영창대군의 왕위 싸움은

광해왕이 복수를 함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으로 강등되었다.

인조 때 세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후궁 조씨의 소생

숭선군의 정권 싸움은 후궁 조씨 일파에 의해 장자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죽음을 맞고, 둘째 봉림대군(1619∼1659)이 효종이 된다.

후궁 조씨는 효종 2년(1651년) 역모사건으로 사사되었다.

일부에서는 인조 때 발생한 병자호란의 후금과 정묘호란의

청나라가 서로 다른 나라인 줄 아는데,

사실 청나라는 1636년에 후금이 국명을 바꾼 것으로

후금과 청은 같은 나라이다.

1) 폐비 윤씨(윤비)와 인수대비 사건:

1474년(성종 5년)에 왕비가 죽은 뒤 계비로 들어온 윤비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윤필상 등이 모함하여 폐비가 되고

결국 사약 받음.

질투와 시기가 많던 윤비는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을

빌미로 폐비가 됨.

윤비의 아들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생모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생모 윤비를 모함한 성종의 후궁인 정씨·엄씨와 조모 인수대비를 죽임.

2) 왕조실록 열람 사건과 무오사화:
왕조실록의 기록 문제가 발단인 무오사화(1498)는

연산군 시절에 이극돈(1435~1503)이 실록을 편찬하는

관리가 되어 사초를 훑어보는데,

자기의 과거 비리가 기록되어 있자 사초를 수정코자

이극돈·유자광·노사신·윤필상 등과 모의하여,

왕께 내용을 조작하여 고하고, 반대파 김종직· 김일손 등

신진사류를 모함하고 탄압한 사건.

3) 광해왕과 영창대군:
광해왕(재위 1608~1623)은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 김씨의 아들로 광해군은 임진왜란 기간 중 평안도·

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집하는 등 활약하여 백성의 지지를 받았음.

광해왕은 명과 후금(만주의 여진족, 청)의 두 나라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치고,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당쟁에 휩쓸려 포악하고 방탕한 이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켰으며, 후에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양천의 구암 허준은 선조와 광해군의 어의로 1610년

(광해군 2)에 당대 최고의 의서인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4) 인조와 청나라(병자호란, 남한산성):
광해왕을 축출한 인조(재위 1623~1649) 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였다.

청나라(후금이 1636년에 국명을 변경) 태종은 1627년 1월

‘아민’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여

3월 초까지 2개월 동안 계속(정묘호란).

그 9년 뒤인 1636년 12월 2일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다시 쳐들어왔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의주부윤 임경업(1594~1646) 장군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청은 의주를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2월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군은 개성을 통과하였다.

임경업은 청나라 군사를 국경에서 막으려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이 포위당하기에 이름.

1637년 1월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

이때 소현세자·빈궁·봉림대군 등이 청나라 인질로 잡혀감.

장남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 후 의문사 한다.

후궁 조씨(조귀인) 일가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자자.

세자빈 강씨(1611~1646)도 후궁 조씨의 모함으로

다음 해에 사약을 받았다.

청나라에서 8년간 볼모생활을 한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효종(재위 1649~1659)으로 즉위한다.

1651년(효종 2년)에 인조의 후궁 조씨와 김자점(1588~1651)의

역모가 드러나,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모함한 후궁 조씨(조귀인)와

임경업을 몰래 죽인 김자점이 둘 다 사사된다.

5) 장희빈과 동이(숙종과 인현왕후)
숙종(재위 1674∼1720)은 아들 2명을 장희빈(아들 경종)과

동이라 불린 숙빈 최씨(아들 영조) 사이에서 얻음.

그러나 장옥정(희빈)의 인현왕후에 대한 모함이 정도를 넘었다.

장옥정(1659~1701)이 낳은 왕자 윤(경종)이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오름.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킴. 1694년에는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가 아들(후일 영조)을

낳아 장희빈과 정치적으로 대립함.

장희빈은 1701년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근처에 신당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사사되었다.

6) 사도세자와 세자빈 혜경궁 홍씨
52년간 임금이었던 영조(재위 1724~1776)는

숙빈 최씨(동이)의 아들로 성군이었지만

친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오점을 남겼다.

한중록을 집필한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빈.

영조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했으며,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편 조선의 성군. 한중록은 정조의 생모이며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인 회고록으로,

혜경궁 홍씨가 부군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참변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일생사를 순 한글의 유려한 문장으로 묘사한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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